8. 잠시 미웠습니다

신입사원 일기

by 레룬

1. 억울함은 진심의 다른 말


코 끝이 시려운 계절이 되면서 연말 성과 압박도 함께 오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그게 잘 되던 프로젝트를 갈아엎는 기간이었고, 하필이면 새로운 매니저에게 내 첫인상을 보이는 기간이었고, 또 하필이면 난이도가 높은 프로젝트였 ... 하필이란 단어를 이렇게나 반복하다니 아무래도 상황이 얼추 진정된 지금까지도 감정이 남아있나보다.


10월은, 정말 억울했던 달이다. 내 피땀눈물이 시스템 상으로 집계되지 않을 수 있고, 정성적으로라도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뺏길 수도 있고, 인정은 커녕 안 좋게 오해받을 수도 있음을 몸으로 배웠던 기간이다. 일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으로 했던 일들이 물거품 된 것 같아 서러웠다. 애써서 어필해봐도 작은 조약돌을 허공에 던지는 기분만 들고, 이해해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가 된 것도 같아서 허무했다. 가시적이진 않지만 분명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쓴 게 문제가 됐다.


마지막 2주동안은 이틀에 한 번 꼴로 소환되어 쓴소리를 들었다. 숫자가 왜 이러냐, 성과 가져와라 하는 말들이었다. 설명과 설득 사이 어딘가의 말들을 열심히 해봤지만 당장 성과가 없는 사람의 말이 잘 들릴 리가 있나. 최소한의 자신감마저 깎였고 그 끝엔 반갑게도 어떤 "깡" 같은 게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서운함과 억울함을 풀기 위해 일단 반드시 성과를 내고야 말겠다는 그런 마음. 조용히 씩씩거리며 울다가 첫 인턴 생활하면서 팀장님이 다른 직원 분에게 해주시던 말씀이 스쳐지나갔다. "오늘 그렇게 화내면서 싸운 거, 잘했다. 주니어땐 화도 내고 울기도 하고 그런 게 난 멋있더라". 얼마나 성숙했고 프로다웠고를 떠나서 직원분의 진심을 알아주는 말씀인 것 같아 와닿았다. 나도 그 말이 너무 듣고 싶었던 것 같다.



2. 억울함의 뿌리


감사하게도 나는 내가 내 감정을 인지하기도 전에 "지금 억울해해도 되는 상황이에요"라고 먼저 말해주는 동료들이 있었다. 한 발 앞서 이 불합리함을 마주하고, 싸우고, 그 뒤에 나름대로의 결론으로 화해한 선배 동료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제서야 이 불합리함이 지속되는 데에도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됐고, 내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객관적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낯선 감정인 억울함의 뿌리를 계속해서 파봤다. 충격적으로 좋은 경험이었다.


부끄럽지만, 그 깊은 억울함의 기저에는 "내 생각이 옳다"는 마음이 어느정도 있었다. 내가 이 일의 담당자니까, 내가 제일 많이 알고 제일 많이 고민한 부분이니까, 이렇게 되는 게 맞다는 계산이 무의식 중에 자리 잡혀있었다. 내가 불순하거나 성실하지 않은 사람도 아니니 내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을 거란 자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때, 결정에 따르면서도 내심 찝찝함을 남겨두었다. 그렇다고 불만을 해소할만한 여유가 되지는 않아서 적절한 타이밍을 찾다가 한 순간에 폭발해버린 꼴. 싸우기는 싫고 고집은 있었던 게 아닌지 되돌아봤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웬만해선 내 손으로 하려는" 관성이 꽤 강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이게 책임감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건 내가 여태까지 주로 어떤 과제를 수행해내는 역할이었지 일을 위임하는 역할을 덜 해봤기 때문에 하는 착각일 수 있겠다. 적어도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과제를 쪼개어 부지런히 토스하기를 반복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언제 직접 손을 대고 뗄 지에 대한 판단미스와 위임 능력의 미숙함을 인정하고 나니 후련했다.



3. 피구의 판을 읽기


오늘 오랜만에 회사에서 마음이 정말 편했다. 이런저런 두려움과 미숙으로 그동안 대기선수에 머물러 있었다면, 오늘은 본격적으로 플레이어로 뛰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쓴소리를 들은 건 똑같지만 마음가짐이 분명히 바뀌었다. 이전에는 내 생각을 설득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면, 오늘은 내 매니저들의 입장을 더 생각하면서 일할 수 있었다. 성과가 안 나면 내가 혼나는 것도 혼나는 거지만 내 매니저도 본인 매니저에게 할 말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얼마 전까지 미웠던 매니저들이 내게 쓴소리 하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각기 본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동등한 사람들로 보였다. 그러니 불필요한 두려움도 긴장감도 사라지고 할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문득 10월엔 내가 피구와 같은 팀스포츠를 요가 수련하듯 대한 게 아닐까 싶었다. 어떻게 하면 한 동작 한 동작 잘 해내고 동작 사이를 부드럽게 이을지 고민했지, 내가 언제 공을 쥐고 던지고 패스할지를 몰랐다. 팀스포츠에서는 특히 힘 뺄 때와 줄 때, 공격수일 때와 수비수일 때를 잘 구분해야 하고 무엇보다 경기 판을 읽는 눈이 필요하다. 판을 읽는 것에 집중하면 사람이 미워질 일은 잘 없을 것이라고 믿어본다. 잠시 너무 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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