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일기
이틀 전에 연말성과 리뷰를 작성하고 나니 비로소 새해가 실감된다. 프로젝트 성과가 안 좋았던 마지막 분기가 2025년을 어두운 기억으로 물들일 뻔 했으나, 차분히 돌아보니 배운 것도 좋은 기억도 가득했다. 단순히 사회의 쓴맛 차가운 맛을 봤던 해로 기억 남기긴 싫어서 생각을 꼭꼭 씹어본다. 혼란스러웠던 적응기에 대한 모든 속상함과 힘듦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여기에만 남겨두고 내일부턴 다시 씩씩하게 출근해야지.
1. 억울하게 저성과자로 프레이밍 되었단 생각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상황이 바뀌면서 지표에 태클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억울하게 표적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이건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합의된 줄 알고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당황스러웠다. 알고 보니 알아서 지표를 높여오겠거니 기다려주고 있었던 거고, 나는 자유도가 생겼다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더욱 벌리고만 있었다. 결국 목표의 얼라인이 제대로 안 되어 있었던 거고 내 책임 영역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어디까지 내가 결정권을 쥐고 있고, 어디부터는 논의가 필요한지 또는 컨펌이 필요한지를 구분하고, 내가 쫓아야 할 건 뭔지를 분명히 해야함을 깨달았다. 내 가시권과 결정권 내에 있는 것들에 대해선 정말 확고한 태도를 가져야된다는 것도 배웠다.
2. 내 노력과 기여분을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한단 생각
열심히 하고 좋은 인사이트 쏟아내줘서 고맙지만 좀 자제해달라는 말을 들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나 혼자만 프로젝트에 진심인 것 같은 마음에 속상했는데, 큰 그림을 보기 시작하면서 차차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한 팀이라기보단 TF팀 성격으로 모였던 거고 이 팀의 기한이 다 되가는 시점에 내가 우리 더더욱 뭉쳐보자고 외치는 꼴이었다. 이젠 TF팀으로 지냈던 기간동안 합의된 걸 바탕으로 각자 뿔뿔이 흩어져 플레이할 때가 왔다. 내 노력과 기여분이 무시당한 게 아니라, 에너지 쏟을 방향성이 달라진 거다. 다시 한 번 자유로운 업무 환경에서는 특히 우선순위와 목표의 얼라인이 중요함을 새긴다.
3. 공격적인 환경이란 생각
수치에 집착하고, 솔직하고 비판적인 피드백이 난무한 환경이 무자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대상에 "참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건 스스로의 성향이 반대 극단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는 글을 보고선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나 생각하게 됐다. 사실 맞다. 남한테 싫은 소리하는 법을 모르고 수치 향상에 큰 성취감을 느끼는 타입도 아니다. 프로젝트를 실패하면서 때론 미움 받을 것을 감수하고도 할 말을 해야 하고, 일이 어떻게든 "되게 하기 위해" 집요함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됐다.
4. 회사는 자아실현할 곳이 아니란 생각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자아가 계속 강해지는데, 회사에서는 또 자주 자아가 깨부숴지는 과정의 반복이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회사 일을 삶의 너무 중요한 일부분으로 인식하니 회사 일이 조금만 잘 안 되어도 기가 죽고 속상한데, 납득되지 않는 부분들도 동시에 보이니 순수히 잘해내고 싶단 마음에만 집중하긴 어려웠다. 나는 그런 복잡한 마음을 회사는 자아실현할 곳이 아니란 생각으로 잠시 매듭짓기도 했었다. 냉소로 나를 보호하려고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가치판단과 철학이 견고해진다. 문제는 회사가 내 철학을 충족시켜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면서부터인 것 같다. 애초에 회사는 기능 수행을 목적으로 하지 같은 철학으로 모인 집단이 아닌데 철학 부분에서의 공감을 바라면 안 되겠다. 내가 원하는 자아상은 철학도 깊고 스킬도 훌륭한 사람이고, 회사는 스킬을 축적하기에 좋은 장이라는 점에서 결국 내게 자아실현에 중요한 수단임엔 부정할 수 없다. 다만 회사에서의 경험만으로는 자아실현에 부족하다고 느끼니 회사 밖에서 내 철학을 갈고닦는 시간도 성실히 가꿔나갈 것. 하마터면 세상을 향한 냉소에 빠져있을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