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일기
1. 업무평가가 뭐라고
동료평가를 제출하는 시기가 왔다. 갑작스런 커피챗이 늘어나고, 메세지로 나누는 대화가 미묘하게 조심스러워졌고, 그렇게 오피스에 점점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8개월만에 받는 첫 정식 업무평가. 중간중간 진행됐던 피드백들을 잘 정리하고 소화하는 일일뿐이라며 가볍게 마음 먹었는데, 그런 태도가 겉으로도 티가 났는지 주변에선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어필해야 함을 말해준다. 성과를 증명할 마지막 티끌까지 잘 모았는지, 효과적으로 포지셔닝하고 스토리텔링 했는지, 혹시 모를 리스크나 더 인정받을 수 있는 여지에 대해 굳이 리더에게 한 번이라도 더 얘기했는지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회사를 다닌 분들 앞에서 이런 마음을 품는 게 참 부끄럽고 건방지지만 사실 지금 너무 지쳐서 힘이 잘 안 난다. 보란듯이 멋지게 해내고 감사한 말씀 덕분에 잘 마무리했다고 인사드리면 좋으련만.
내 포커스가 지금 업무평가에 있지 않아서 그렇다. 내가 품고 있는 고민과 감정들이 퍼포먼스 리뷰가 잘 끝난다고 해서, 성과금 좀 더 받고 동료들의 인정을 받는다고 해서 해결될 게 아닌 것 같다. 회사를 옮긴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고 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해결 가능한 "문제"의 형태라기보단 잘 데리고 살 감각을 익혀야 하는 체득과 치유의 영역인 것 같아서 어떤 조바심이나 반짝하는 열정에 기대지 않고 싶다. 이 찝찝함에 굳이 이름을 붙여본다면 .. 환멸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어른스러워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연히 SNS에서 본 온라인툰의 내용이, 내가 지난 반년 간 씨름했던 감정을 설명해주는 것 같아 너무나도 위로됐다.
A: 변호사님 요즘 OO 사건 유명한데 그거 다뤄주시면 안돼요?
B: 제가 변호사로 살면서 제1원칙으로 삼는 게 뭔지 아세요? 남의 사건에 말 끼얹지 않기요.
A: 엥? 왜요?
B: 제가 로스쿨 시절에 인턴하면서 아이돌 전속계약 해지사건 기록을 봤거든요?
아이돌들이 사장이 자기들한테 일을 안준다고 소속사를 나가기로 한 거였어요.
A: 그건 나가는 게 맞지 먹고 살 수가 없는데.
B: 근데 더 읽다보니까 사장이 일을 줬는데 애들이 하기 싫어서 안줬다고 거짓말 한 거였어요.
A: 아이들이 나빴네.
B: 근데 알고 보니까 줬다는 일이 평범한 일들이 아니고 막 논란 있는 유튜버 방송 출연하기랑
4시간 이동하고 30분 공연하고 다시 4시간 이동하기 뭐 그런 엄청 안 좋은 일들뿐이었던 거죠.
A: 에이 그럼 사장이 나빴던 게 맞네.
B: 근데요,
A: 아니 또 뭔데요
B: 알고보니 그 아이돌이 인지도가 낮아서 사장이 따올 수 있던 게 그런 일들 뿐이었던 거에요.
A: 그럼 결국 아이돌 애들이 나쁜거네요?
B: 근데요,
A: 아 또 왜요
B: 그 아이들이 왜 잘 못 나갔을까요?
A: 헐 그건 또 사장 탓이에요?
B: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부분이 정말 많아요.
A: 이제 제가 왜 남의 사건에 말을 안 얹는지 아시겠습니까?
B: 아니 끝까지 얘기해줘요 사장이 뭐 잘못했는데요
@quack_lawyer / 꽉 볍률사무소
2. 이 환멸감은 어디서 왔지
비단 법이나 아이돌의 세계의 이야기만이 아니고 인간사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변화 만들기를, 제시하고 해결하기를, 더 나은 상태로 이끌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동력으로 지금까지 움직여왔다. 그러려면 지금의 문제를, 미래와의 갭을 설명하고 분석하고 설득해나가는 과정이 주가 되는데, 현실에서, 특히 검증 절차와 이해관계가 복잡한 곳일수록 이건 정말 어려워진다. 저 온라인툰 사례에서처럼 이리보면 이게 맞고 저리 보면 저리 맞기 때문에 결국엔 "누가 무엇을 관철시킬까"의 문제가 되고 옳음, 선, 최고를 가리는 일이 아니게 된다는 것. 가치를 동력으로 삼았던 순수한 마음은 실리적 논리 앞에서 다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싶은 마음에 많이 괴로웠다. "이렇게 해보자니까", "이거 모순이잖아", "이건 좀 아니라는 거 우리 다 알잖아", "이거 문젠데 왜 아무도 손 쓰지 않는 거야"와 같은 말들을 외치며 분노하고 울다가 지친 상태다.
주장을 펼치고 관철시키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낄 줄 알았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까. 난 변화를 설계하는 것, 관찰하고 분석하는 걸 좋아했지 execution에 있어서는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마주해야 하는 비판과 설득의 연속, 언제 어떻게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불확실함, 결과를 보려면 또 피할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각종 번거로운 일들, 그런 게 사실 9할이란 걸 받아들이질 못한 걸까. 설계와 분석만으로 깔끔히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 성급한 마음을 지니고 있던 건 아닌지 싶기도 하고.
3. 원하는 게 이직은 아니고
요즘 SNS에서 이런 글이 자주 보인다. 2년 정도도 어떤 성과를 내보기에 너무 짧은 시간인데 요즘 MZ들은 너무 빨리 이직하려고 한다는 말. 오래 직장생활 하신 분들이 어떤 의미로 말하는 의견인지 알겠지만 나도 "요즘 MZ"라 그런지 단번에 와닿진 않았다. 대입을 준비하는 입시생, 취준생, 로준생, 아준생, 늘 넥스트 스텝을 "준비"하는 상태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게 익숙한 현대인에겐 직장인이라면 동시에 "이직 준비생"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우니까. 그런데, MZ의 성급함을 지적했던 저 글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돈다.
기회가 다양한 세상이라 늘 준비의 상태에 있고 무언가를 관철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다면 그걸 이루기가 비교적 쉬워진 시대다. "문제 해결"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설계된 뉴타입의 조직들도 얼마든지 많고, 그러니 변화를 빠르게 기획하고 결과 보고 싶은 거라면 심플하게 변화에 대한 저항이 더 약한 곳을 찾아가면 되는 건데 또 그게 내 정답같진 않다. 실패에 관대하고 변화를 가볍게 시도하도록 설계된 조직과, 애초에 리스크 관리가 최우선인 곳에서 변화를 일으켜보는 건 다른 재미이고, 난 후자를 더 즐겨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렇다면 내가 성급함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는 거겠지.
4. Integrity와 일관성
3개월 전부터 레이징 했던 이슈가 이제쯤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인 이유에는 내가 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맥락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상당 부분 외부적 요인들에 달려있는 것들에서 내 성장감을 찾으려해서는 안 되고,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나만의 성장 체감 포인트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게 Integrity와 일관성을 기르는 일이다. 인테그리티.. 누가 보고 있지 않아도 옳은 일을 하는 걸 의미한다. 각종 복잡한 상황에서 이 두가지를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았고, 이게 흔들릴 때마다 내 역량이 가늠되는 것 같았다. 깔끔하게 처리 된다면 굳이 지저분한 일엔 손 대지 말기로 타협하기가 너무나도 쉽기 때문이다. 늘 좋은 성과를 깔끔하게 내놓을 수 있고, 옳다고 합의된 일이면 먼저 손에 흙 묻히는 것도 주저하지 않게 될 때면 스스로의 성장이 체감될 것 같다. 또 어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마주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뭐든간에 늘 미소, 자신감, 겸허함을 유지하면서 일관되게 지내는 것에만 당분간 집중해보려 한다. 인간사가 다 이런 거라면, 그저 내게 중요한 걸 알고 지켜가면 장땡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