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사의 하루

꽁트입니다

by 레마누

"왜 시계 있잖아. 너네 형부가 대만 갔다 오면서 사고 온 로즈골드시계."

"아, 내가 예쁘다고 말했던?"

"어. 그 시계를 글쎄 하은이엄마가 모임 때 하고 온 거

있지?"

"언니도 하고 갔어?"

"당연하지. 저번 모임 때도 난 그 시계를 하고 갔어.

나 요즘 나갈 때마다 그거 하잖아. 팔찌 안 해도 되고,

팔찌보다 예쁘고.."

"진짜 이쁘긴 이쁘더라."

"그러니까. 분명 저번 모임 때 엄마들이 다 돌려보면서 예쁘다고 했거든. 하은이엄마도 예쁘다고 난리를 폈어. 걔 목소리가 제일 컸어."

"근데 똑같은 건 맞아?"

"맞다니까. 느낌이 싸해서 한번 보자고 했어. 그랬는데 정말 똑같은 거야. 말로는 남편이 면세점에서 생일선물로 사 왔다는데 야. 그게 어디 남자가 고를 만한 시계였니? 분명 하은이엄마가 사진 찍고 똑같은 걸로 사 오라고 했겠지."

"에이, 설마. "

"설마가 뭐야. 진짜라니까."

"걔, 예전부터 묘하게 내가 산 가방이나 옷들이 겹친다 생각했는데. 이번에 시계 똑같은 거 보니까 완전 소름 돋았잖아.'

"그럴 수가 있나? 언니가 잘못 생각할 수도 있는 거겠지?"

"야, 너 언니 촉 몰라? 느낌이 왔어. 싸한 느낌이.. 걔 이상해. "

"언니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무슨 그런.ㅋㅋ 그런가?"


김여사는 한 시간째 전화기를 들고 있다. 소파 아래는 건조기에서 꺼낸 빨래가 세탁기에 들어가기 전보다 더 구겨진 채 어지러워져 있다. 건조리를 사고, 식기세척기를 사고, 로봇청소기를 샀는데도 왜 집안일은 줄어드는 것 같지 않은지. 점점 게으러지면서 꼼짝도 하기 싫어지는 게 다 저 기계들 때문인 것도 같았다. 얼른 집안일을 끝내고 걷기라도 해야지. 김여사는 전화통화를 하면서 왼손으로 배를 문지른다. 어제 와인을 괜히 마셨나. 배가 더 나온 것 같다.


"야, 잠깐만.. 얘도 양반은 못 됐나 보다. 하은이엄마 전화다."

"왜? 갑자기?"

"글게, 일단 끊어봐. 이따 전화할게."


"어, 하은이 엄마 웬일?"

"언니, 어디세요?"

뭐야. 갑자기.. 생전 안 하던 전화를 해서는 웬 안부 궁금?

"집이지. 뭐."

"저기. 언니. 나 지금 학교도서관 도우미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지민이가 아까 도서관에 왔다가 화장실을 갔다 왔는데."


김여사는 지민이 이름이 나오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민이는 김여사의 막내딸이자 마흔이 넘어 낳은 소중한 아이였다. 지민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놓고 얼마나 안절부절을 못했던지 김여사는 한동안 입술이 부르트고, 감기를 달고 살았다. 9월인 지금은 지민이가 어느 정도 적응을 한 것 같아 마음의 여유가 생긴 김여사였는데.


"그래서? 왜? 우리 지민이가 뭐."

"지민이가 저기 바지에 실수를 했어요. 일단 제가 아이들 모르게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임시조치는 했는데, 팬티랑 바지에 너무 많이 묻어서요. 언니가 옷 챙겨서 얼른 오세요."

"뭐? 지민이는 괜찮아?"

"네. 도서관에 있어요. 다른 아이들은 다 돌려보냈고, 지민이도 잘 달랬으니까 언니가 지금 오시면 될 거 같아요."

"그래, 알겠어. 금방 갈게."


김여사는 흥분하면 얼굴이 빨개지면서 열이 오른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손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다. 아침에 혈압약을 먹었나?

자동차키를 찾는 김여사의 얼굴이 빨갛다.

서둘러 아이옷을 종이가방에 넣고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온다. 김여사의 손목에 가느다란 로즈골드시계가 반짝이고 있다.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김여사는 샤인머스켓박스와 멜론박스를 들고 하은이엄마를 찾아와서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아니에요. 언니. 뭐 이런 걸 다. 이렇게 안 해주셔도 됐는데.."

"아니야. 자기 덕분에 우리 지민이가 무사히 넘어갔어. 만약에 아이들이라도 알았어 봐. 평생 낙인찍히는 거잖아. 생각만 해도 무섭다."

"뭘, 그렇게까지. 아직 어린데 그럴 수도 있죠. 제가 마침 그날 도서관에 있어서 다행이었죠."

"그러니까, 자기가 내 은인이다. 정말. 우리 지민이도 이모한테 꼭 고맙다는 말 전해달래. 많이 놀랬었는데 이모가 잘해줘서 마음이 놓였다고."

"네. 언니. "

"고마워. 그냥 다 고마워. 다음에 내가 맛난 밥 살게."

손을 흔드는 하은이엄마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로즈골드시계.


김여사는 눈을 한번 찔끔 감고 나서 시계를 동생한테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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