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사라졌다

있음직한 이야기

by 레마누

영희 엄마는 동네에서 유명한 효부였다. 영희 엄마는 내리 딸 넷을 낳은 종갓집 큰며느리로서 시어머니를 30년 가까이 모시고 살았다. 영희엄마의 남편이자 종갓집 장손인 남자는 세상에 둘도 없는 난봉꾼이었다. 일찍이 음주가무에 눈을 떠 이십 대의 대부분을 유흥업소에서 보냈다.


놀다 지친 그는 나중에는 자신이 직접 술집을 차렸다.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자 금세 흥미가 빠졌는지 남자는 그마저도 때려치우고 사업아이템을 찾는다는 핑계로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시러 다녔다. 남자는 가끔 집에 들렀고 그럴 때마다 아이가 생겼다. 서슬 퍼런 시어머니가 옆방에 있어서 영희 엄마는 한 번도 마음 놓고 소리를 질러보지 못했다.


처음에 딸을 낳을 때는 시누이 5명이 돌아가며 출산선물을 준비해서 찾아왔다. 시어머니조차 큰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을 했다. 둘째가 딸이었을 때는 친하게 지냈던 막내시누이만 봉투를 놓고 갔다. 시어머니는 미역국을 끓이며 한숨을 쉬었고, 남자는 우는 갓난아이를 보다 집을 나갔다. 세 번째 딸을 낳을 때는 영희엄마가 혼자서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후에 남자는 친구들 모임에서 영희엄마가 5분 만에 아이를 낳았다고 말했다. 사실 가진통까지 합치면 이틀을 꼬박 아팠지만, 영희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넷째가 딸이라는 말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고개를 돌리고 흘리는 눈물은 다시 눈으로 들어갔다. 눈이 매웠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배고프다고 우는 넷째 딸에게 젖을 물리며 영희 엄마는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남자는 사명감을 갖고 밤마다 찾아왔다. 무슨 영문인지 그 후로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종갓집 장손이자 4대 독자의 아내였던 영희엄마는 딸 넷을 낳았고 일 년에 13번의 제사 명절을 치르며 30년의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영희 엄마는 스무 살에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평생 남자라곤 같이 사는 그 남자밖에 몰랐다. 아이들이 커서 제 갈길을 간다며 집을 나갔다. 키울 때는 4명의 자식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한꺼번에 집을 나가자 영희 엄마는 텅 빈 집이 두려워졌다. 시어머니와 둘만 있는 시간이 늘었다. 남편은 일을 한답시고 삼일에 한번 집에 들렀다 밥만 먹고 나갔다. 밥을 먹을 때도 핸드폰만 보느라 제대로 된 말을 해 본 지가 언제인지 몰랐다.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어느 날 영희엄마는 짐을 쌌다.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 날 집을 나갔다. 영희 엄마의 부재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시어머니였다. 남자에게 서둘러 전화를 한 노모는 그러나 퉁명스러운 아들의 목소리에 크게 실망하고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한창 바쁠 때 전화를 하게 한 영희 엄마에게 화가 났다. 한바탕 쏘아붙일 생각으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순간 자잘한 소름이 돋아났다. 30년을 살며 영희엄마는 남자의 전화를 두 번 이상 울리게 두지 않았다. 남자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딸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고등학생인 막내딸이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말했다. 그제야 남자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집에 돌아왔다. 영희 엄마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영희 엄마의 부재는 남자에게 곤란한 상황을 야기했다. 남자는 신용불량자였다. 모든 재산은 영희 엄마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이대로 영희 엄마가 사라진다면 남자가 무일푼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남자는 영희엄마를 찾아야 했다. 찾아서 재산을 가져와야 했다. 그런데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남자는 순간 영희 엄마의 친정집을 생각했지만 전화번호에 있는 그 많은 숫자 중에 선뜻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남자는 영희 엄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알 필요가 없었다. 영희 엄마는 불평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남자가 하는 말을 군말 없이 따랐다. 남자의 친구들은 그런 영희엄마를 두고 조선시대여자라느니, 남자가 전생에 복을 받았다느니, 하는 말로 추켜 세우곤 했다. 남자는 그럴 때마다 말은 안 했지만 어깨가 올라갔다.


그래서 남자는 지금 화가 치밀었다. 착하고 등신 같은 것이 나를 감히 능욕하고 있어. 생각하면 없던 분노까지 치밀어 올랐다. 정작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남자는 영희엄마를 보면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일주일 후가 제사였다. 남자는 무조건 영희엄마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진짜 영희엄마는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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