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by 레마누

ㅣ좋아하는 웹툰중에 "쌍갑포차"가 있다. 오늘의 이야기는 웹툰에서 시작된다.


다음 웹튠 쌍갑포차



(장면)

평생 시집살이에 시달리다 시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박차고 나와 하숙집에 살고 있는 중년 여성인 내가 아들과 결혼할 여자를 만나고 있다




-딸 같은 며느리, 엄마 같은 시모..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너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선은 아들 입장 먼저 생각하는 승지 엄마일 뿐이고 이 세상에서 내 딸은 호주에 있는 유희뿐이야. 며느리가 딸 같으면 고부갈등이란 건 존재하지도 않겠지. 그러니까 애초에 말 같지도 않은 그런 허황된 생각이나 목표는 서로 가지지 않았으면 하고 수민이에게 부탁하는 거야. 만약 내가 엄마 같은 시모 딸 같은 며느리를 바란다면 나는 그럴 자신도 생각도 전혀 없다고 미리 말할 수밖에 없겠구나. 수민이는 나에게 손님이야.


나는 그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지만 내 남편이 내 어머니에게 어떻게 대우받았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 크게 어려움이 없을 거야. 수민이라는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에 며느리라는 탈을 씌우고 시댁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감투아래서 꼬나보지 않도록 노력할 거야. 내 마음에 그런 씨앗이 있는지 매일매일 돌아볼 거야.




-(시어머니의 환영) 너야말로 웃기지 마! 그런 소리 하면 뭐 있어 보이는 줄 아나 보네? 학교도 제대로 안 나온 주제에 서점에서 며칠 책 읽었다고 척하기는! 손님? 네가 그럴 거 같지? 며느리 집에 들여봐라. 그게 되는지! 며느리가 고개만 조금 들어봐라, 네가 무슨 생각이 드나. 너 나랑 내기할래?




-평소에 정상적인 사람도 시어머니가 되고 며느리가 되면 마치 약에 취한 듯 변해버리고 이상한 관계 속으로 제 발로 걸어가는데 나는 내 발목을 비틀어서라도 그러지 않으려고.




-(시어머니의 환영) 와.... 쟤 말하는 것 좀 봐라, 어미야 너 드라마 찍니?




-그리고 수민이와 최대한 거리 두고 지내며 우리가 더 좋아하는 관계보다 덜 미워하는 관계에 집중할 거야


-어머니,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야.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미리 짐작 시댁 사람들 앞에서 특히 내 앞에서 며느리라는 이유로 주눅 들지 마, 수민아. 그렇게 사는 게 생지옥이야 생지옥에서 살 것 같으면 결혼을 왜 해야 하니.




-중략-




-다시 말하지만 나는 승지 엄마일 뿐이고 너는 사돈댁 딸일 뿐이야. 그리고 나는 너를 평생 손님으로 대우할 생각이야.....

(쌍갑포차의 한 장면을 그대로 썼습니다)




결혼하고 제일 이상한 일은 우리 엄마가 남편에게 쩔쩔맨다는 것이다. 우리가 내려간다고 하면 엄마가 밭에 갔다 와서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청소를 했다. 자식한테는 한 번도 해 준 적 없었던 고기와 생선을 위주로 한 반찬이 10가지가 넘는 상을 차리고도 차린 게 없다고 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낯설면서 슬펐다. 자신의 딸이 행여나 책이 잡힐 까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에 집을 청소하고, 상을 차렸을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엄마는 몰랐다. 내가 시댁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사위가 백년손님이라면 며느리는 결혼한 순간부터 노예이자 가정부이자 완벽한 여자로 변신해야 한다.



나는 결혼 전에는 제사음식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시집가서 다 할 건데 뭐 하려 하냐며 놀다 오라고 했다. 그래서 제삿날이 되어도 힘들 줄 몰랐다. 맛있는 음식 먹으며 실컷 노는 날인줄 알았다.



결혼하고 첫 제삿날이었다. 이미 전날 12시까지 시어머니댁에서 적갈고기를 두들기고, 동그랑땡을 빚느라 녹초가 됐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시어머니가 빨리 오라며 전화를 하셨다. 나와 두 명의 형님과 시어머니는 밤 12시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시아버지와 어머님의 아들 셋은 가만히 앉아 있다 절 몇 번 하더니 또 가만히 앉아서 티브이를 봤다.



제사상하나 치울 생각하지 않은 남자들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오빠"하고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울 서방님은 마치 부엌에 처음 온 듯이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오빠. 상 정리하고 그릇 좀 닦아주세요." (그래야 우리가 빨리 집에 갈 수 있어요.라는 말은 생략했지만 남편이 알아들은 것 같았다.) 남편이 행주를 들고 거실에 갔다. 막냇동생이 상을 접자 아주버님 두 분도 엉거주춤 일어나 거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있는 힘껏 째려보는 시어머니와 깜짝 놀라는 형님의 모습이 보였다.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렵다. 제사를 일 년에 열두 번 하는 시댁에서 이제는 남자 셋이 먼저 상을 치우고 그릇을 정리한다. 설거지까지 시키면 연로하신 울시어머니 뒤로 넘어가실 까봐 차마 그건 못 하고 있지만 아들과 조카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함께 하고 있다.



누군가 우리 집안의 손님으로 대한다면 손님 역시 대접받은 만큼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정중하게 대한다. 만일 나를 하인으로 대한다면 나도 무식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하인처럼 상대를 대할 것이다

뭣이 중한대요? 하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덤벼들지도 모른다




굳이 푸줏간의 김서방이야기를 갖고 오지 않아도 된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곱다는 건 9살 막둥이도 아는 말이다. 내가 바라는 건 사위를 백년손님 대하듯이 시어머니들도 며느리를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손님으로 대하는 것이다. 조금 더 예의를 갖추고 정중하게 대해주었으면 한다. "너도 시어머니 되어 봐라. 그게 맘처럼 되냐." 하지 말고. "그래 나는 그렇게 살았지만 너는 그러지 말아라." 이렇게 말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먼 훗날 나도 시어머니가 되겠지만(된다는 가정하에) 지금 이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써 놓는다



사족 : 요즘 남편이 집에 있는 날이 늘었다. 삼시세끼 상을 차리다 보면 어느 순간 밥상을 엎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하나 없다. 내 속만 시끄러워질 뿐이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 먹었다. 나는 식당주인이고, 남편을 손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평소보다 더 예쁜 접시에 신경 써서 음식을 담았다. 남편 먹을 거다 생각할 때보다 손님한테 나갈 거다 생각했더니 손이 여러 번 갔지만 그럴싸한 밥상이 차려졌다.



자기 집에 있으면서 툴툴거리는 늙은 마누라 보는 남편도 힘들겠지. 나만 불만이 있을까. 남편도 아마 나한테 맺힌 게 많을 것이다. 그걸 굳이 들추지 않고 서로 참고 산다고 주장하며 살고 있다.

주말이면 3명의 아이들까지 손님으로 찾아온다. 글 다 쓰고 우리 집 식당 문 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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