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마누 Jan 18. 2024

무한화서, 불화하는 말들, 이성복시론

시가 쓰고 싶어지는 책


100권의 시집을 읽으면 시인이 된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시집을 읽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헤매다가 이런 것도 시가 된다고? 했다가 아. 이래서 시가 어렵구나로 끝나던 그때.  파란 하늘만 봐도 눈물이 나고 꽃이 피면 서러워 방문 잠그고 시집만 읽었던 그때.

어느 날 거울 속의 내가 말했다.

넌 시인이 될 수 없어...

백날 책을 읽어봐라.

언제까지 사진으로 꽃을 감상할 거니?

한 발짝만 나서도 꽃이 지천으로 피어 흐드러졌는데..

시집을 오십 권쯤 읽었을 때 밖으로 나왔다. 백일을 못 참고 뛰쳐나온 호랑이처럼.

후회는 없다. 다만 아쉬움이 있을 뿐.



<무한화서>와 <불화하는 말들>은 시를 읽다가 혹시 더 빠르게 시를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 찾아낸 책이다. 나는 뭐든 책으로 배우는 사람이다. 마음이 흔들려서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가 뭔지 알고 나서 그 틀에 맞추려고 했다. 그래서 이론집을 자주 읽었다.  시창작 이론책은 시중에 많이  있다. 이론 책들이 대부분  내용이 딱딱하거나 전문적이다. 국어공부하고 나듯  읽고 나면 알 것 같긴 한데 시를 쓰진 못했다.




<무한화서>와 <불화하는 말들>은  조금 다른 형태의 시창작이론서다. 이성복 선생님이 강의의 내용을 알기 쉽게 요약을 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작가님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느낌이 난다. 거기다 얼마나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시는지 귀에 쏙쏙 들어온다.



동산 병원 의사로 계시는 임만빈 선생님이

수필집을 내셨는데 제목이 참 예뻐요

<선생님, 안 나아서 미안해요>

이렇게 책임을 자기 쪽으로 돌려놓으면 예뻐져요

‘의미 있는 나’라는 것은 ‘깨지는 나’ 예요

내가 깨져야 세상이 달라져요. 불화하는 말들 中


책임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막상 사람들은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는 것을 싫어한다. 이왕이면 좋은 말을 듣고 싶고, 나를 돋보이게 하는 말로 포장을 하고 싶어 한다. 과대포장은 과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깨라는 말은 그래서 쉬운 듯 어렵다.


땅주인은 자기 땅에 사는

벌레들을 무시하지요.

자기는 잠시 왔다 가지만,

그것들은 계속 살아왔고

계속 살아갈 존재들인데도 말이에요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귀한 분들의 삶이 다 그렇잖아요

예수나 마더 테레사처럼 말이에요.

‘下人하인’이란

‘아랫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다른 사람보다 아래 서는 것’을 말해요

‘거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려면 스스로 낮은 자리에 서야 해요

글쓰기는 오만한 우리 전복시키는 거예요. 불화하는 말 中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에서 과연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BTS의 노래 중에 ‘작은 것을 위한 시’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글쓰기는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지,

처음부터 대단한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돼요.

나는 물건을 잘 못 찾거든요.

우리 집 사람이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찾아보지도 않고....”

못 찾는 게 아니라, 안 찾는다는 거예요

농구선수 이충희가 그랬대요

연습 끝나고 집에 간다고 해놓고

혼자 돌아와 공을 천 번 더 던지고 갔다고...

많이 쓰세요. 이 구석도 들여다보고

저 구석도 들여다보고

민감하게 바라보세요. 불화라는 말 中


시인과 나의 공통점을 찾았다. 나도 안 찾고 못 찾는다.

천재가 노력을 하면 감당할 수가 없다더니 나는 천재도 아니면서 노력도 하지 않고,그러면서 결과는 또 엄청나길 바라고 있다. 



말을 적게 하면 있어 보여요

말을 다 해버리면 없어 보이는 거예요

돈 받으러 가서 주머니에 손 넣고

조몰락거리면 겁먹어요. 칼이 든 줄 알고....

있어 보이려면 딴소리하지 말아야 해요.

그냥 “잘 지내시지요. 식사는 잘하시고요......”

이렇게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시인이에요

할 말과 안 할 을 구분할 줄 아는 거지요. 불화하는 말 中



내가 시를 쓰지 못하고, 내 글이 시가 되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기어이 다 하겠다는 일념으로 글을 썼다.  숨기거나 돌리면 못 알아볼까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했다. 그러고 나서.. 봐봐. 이제 내 말이 뭔 말인지 알겠지? 어때? 슬프지? 기쁘지? 감동적이지?


상대방이 글을 읽으며 인상을 쓰든 말든 내가 좋아서 글을 썼다. 쓰면서 눈물을 흘렸다. 써 놓고도 너무 좋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글이다.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었다고 말하는 글. 나만 만족하는 글을 썼다. 독자와 숨바꼭질하는 게 아니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듯 다 보였다. 독자는 내가 움직이고 멈추는 타이밍을 알았고, 나는 제일 먼저 죽었다.


<불화하는 말들>이 강의 내용을 시처럼 정리했다면 <무한화서>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언어, 대상, 시, 시작,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잘 익은 수박은 칼만 갖다 대면 쩍 갈라져요. 그처럼 처음에 내가 말을 꺼내지만, 말에 의해 내 삶이 짜갈라지게 되는 거예요. 말로 인해 우리는 지금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어요. 어느 차원이든 상위차원이 그림자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무한화서 中 언어


별것 아니었는데 밥 먹다 생각하니 은근히 기분 나쁜 말, 그런 말이 힘이 있는 말이에요. 치명적 상처를 입은 사람은 ‘난 괜찮아...’ 한대요. 그러고는 퍽 쓰러지지요. 아무것도 아닌 말이었는데, 나중에 ‘아!’싶은 것이 좋은 말이에요. 무한화서 中 언어


내 애기만 하려 하면 과장이 되고, 말에 힘이 붙지 않아요. 다른 사람 얘기를 잘하면 그 안에 내 애기가 다 들어있어요. 시는 남 얘기를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거예요. 무한화서 中 대상


시는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숨기는 거예요. 혹은 숨김으로써 말하는 거예요. 슬픔을 감추는 것이 슬픔이에요. 슬픔에게 복수하려면, 슬픔이 왔을 때 태연히 시치미를 떼야해요. 그것이 시예요. 무한화서 中 시


시의 중심은 자기 안에 있어요. 자기 방에 들어가는데, 쓸데없이 꾸미고 차려입지 마세요 무한화서 中 시작



봄이 오면 괜히 주름치마가 입고 싶어 진다. 밝은 색으로 염색도 하고 싶고, 맨투맨티보다는 하늘거리는 블라우스에 손이 간다. 여름에는 흰 티에 청바지만 입어도 예쁘고, 가을에는 뭐니 뭐니 해도 갈색 트렌치코트다. 틀에 박힌 것이지만 그것만이 주는 매력이 있다. 그걸 상투적이지 않게 은근하게 풀어내는 것 시라면 나는 과연 시를 쓸 수 있을까?


계절을 아는 사람이고 싶다. 계절 따라 사는 사람이고 싶다. 거리에서 예쁘게 차려입은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다.


어제 학원에서 돌아오던 아들이 하늘을 보더니 오리온을 삼일 째 본다고 했다. 그제야 고개 들어 하늘을 봤다.


오리온이 제일 예쁠 때가 언젠지 알아? 언젠데? 겨울 새벽 4시 반에서 5시쯤? 정말? 응. 공기는 차가워서 코끝이 시린데 그때 하늘을 보면 새까만 하늘에 보석처럼 총총이 별들이 박혀 있어. 그중에 제일은 오리온이야. 나란히 세 개가 있는 게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 뭔가 위로가 되기도 하고. 그냥 오리온만 보면 기분이 좋았어.  내가 엄마 닮았네. 나도 오리온이 좋아.  근데 북두칠성은 어디 있는 거야?


아들 덕분에 시골에서 밭에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 작업복을 입고 한숨 크게 쉬고 나서 오리온을 보던 내가 생각났다. 그때가 싫었는데 오리온은 좋았던 기억이 따라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대로 느끼며 산다면 그것 또한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언젠가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어졌다.     

이전 02화 뉴욕타임스편집장의 글을 잘 쓰는 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