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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Feb 01. 2024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레이먼드 챈들러

레이먼드 챈들러는 1940~1950년대에 활동했던 미국의 하드보일드 탐정소설가이다. 젊은 시절에는 여러 신문사를 전전하며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창작욕을 이기지 못하고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가 창조해 낸 필립 말로라는 탐정은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하드도 보일드 주인공의 전형이 되었다. 또한 챈들러가 구사한 문체와 의외의 직유는 이후 많은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 속에서 자신이 미국의 하드 보일드 소설가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고백을 많이 했다. 하드 보일드란 헤밍웨이,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가 확립한 ‘스타일’로, 불필요한 묘사나 감정을 배제한 문체를 바탕으로 주인공(독자)의 시점을 1인칭으로 제한하여 사건을 건개 해 나가는 구조가 특징이다. 하루키는 고교 시절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을 읽고, “그 문체의 비범함에 그야말로 기겁하고 말았다.”라고 한다. 그 후 챈들러의 소설을 틈나는 대로 읽고, 나아가 챈들러의 소설을 직접 번역하며, 그의 문체를 흉내 내려고 했다.     



소설을 쓰다 막히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책을 뒤적이며, 그의 문장을 따라 쓰고 있는 하루키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도 나처럼 막막했겠지. 그도 나처럼 지독한 질투와 동경의 눈을 숨긴 채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었겠지.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똑같았다. 즉 출발점은 같은데 어느 순간 벌어지기 시작한다. 작가를 좋아하고, 모방하려고 애쓰다 그의 작품을 번역하고, 흉내를 넘어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어낸 하루키와 읽을 때는 너무 좋다고 하면서, 읽으며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나.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소설가는 있지만, 아무나 그 소설가를 뛰어넘는 소설을 쓰지는 못한다. 내가 잘하는 건 자책과 반성이고, 가장 못하는 건 실행과 기다림이다.



다시 돌아와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딘가에서 “챈들러는 나의 영웅, 내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와 챈들러를 한 권에 담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챈들러를 읽으며 문체를 공부했다고 밝혔다.    


  

그 외 수많은 작가들과 유명 영화감독들이 챈들러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정유정 작가, 정이현 작가, 류승완 감독이 챈들러를 즐겨 읽는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여러 사람에게 자유롭게 보낸 편지를 발췌, 편집한 책이다. 세상에 알려진 챈들러의 편지를 비슷한 내용끼리 모아서 총 5장으로 엮었다.



편지란 상대가 정해져 있고,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하다. 챈들러의 작품론과 작가들에 대한 생각, 할리우드에 대한 의견과 자신이 창조한 인물인 필립 말로에 대한 챈들러의 생각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상에 대한 이야기까지. 어느 것 하나 빼뜨릴 수 없이 재미있고, 읽다 멈춰서 옮겨적느라 바쁜 시간이었다.     

 


 솔직하게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다 보면 인간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음은 물론이고, 작품에 대한 생각이나 당시의 문학풍조, 동시대작가들에 대한 신랄한 독설 등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소설 속에서 빛났던 챈들러의 문장은 편지글 속에서 더욱 유연하고 재치 있게 춤을 춘다. 생각은 거침없고, 표현은 신랄하다. 


애거서 크리스티, 헤밍웨이, 히치콕에 대한 독설을 읽다 보면 피식 웃음도 난다. 글을 쓰게 된 이유와 쓰는 방법, 글쓰기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들이 여실히 드러나는 문장들을 읽으며 누구보다 글쓰기에 진심이었고, 삶에 충실했던 한 인간을 만날 수 있었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할 수만 있다면,* 객관적인 방식을 서서히 발전시켜서, 독자를 정말로 드라마틱하고 심지어는 멜로드라마틱한 소설로 이끌고 싶습니다. 스타일은 아주 생생하고 예리하지만, 지나친 속어나 은어는 쓰지 않은 소설로요. 그런 방식은 신중하게, 아주 조금씩 시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힘을 잃지 않으면서도 섬세함을 얻는 것, 그것이 관건이죠. 



(*객관적인 방식 등장인물의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사실을 묘사하는 방식은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라 불리며문학적으로 헤밍웨이가 구축했고대실 해밋을 통해 추리소설에 접목되면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낳게 된다스티븐 킹은 그의 저서 <유혹하는 글쓰기>(220)에서 '묘사를 잘하는 비결은 관찰력과 명료한 글쓰기'라며 "챈들러와 대실 해밋과 로스 맥도널드를 읽으면서 이 문제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좌절하게 되는 건, 내가 거칠고 빠르고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글을 쓰면 사람들은 거칠고 빠르고 폭력과 살인이 난무한다고 욕하고, 그래서 다음엔 좀 순화해서, 상황을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에서 더 전개해 보려고 하면, 처음에 욕했던 그것들을 안 쓴다고 욕을 한다는 겁니다. 독자들은 챈들러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원하지요. 전에 이렇게 썼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썼던 건, 그렇게 쓰지 않았으면 훨씬 좋았을 거라는 얘기를 듣기 전이었죠.



좋은 이야기는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추출해야 하지요. 아무리 말을 아껴도 장기적으로 보자면 글쓰기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스타일이고스타일은 작가가 시간을 들여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투자입니다스타일에 관한 투자는, 성과는 느리고, 에이전트의 비웃음과 출판사의 오해를 살 것입니다. 

-중략- 내가 생각하는 스타일이란 개성을 반영한 것이고, 개성을 반영하려면 먼저 개성이 있어야 하니까요. 

-중략- 글의 특색이란 작가의 감정과 통찰의 본질에 따른 산물이죠. 그 특색이 종이에 옮겨 작가가 되게 하는 자질이고, 반대로 똑같이 좋은 감정과 예리한 통찰력을 지녔다 해도 그걸 종이로 옮기지 못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챈들러는 만들어진 작가들을 경계하며 좋은 글이란 작가의 특색이 담긴 스타일 있는 글이라고 말한다. 당장에는 지적이고 유려하고 세련된 듯 하지만, 속이 텅 빈 글들은 거품처럼 사라진다고 생각한 챈들러는 스스로 투쟁해서 스스로의 스타일을 만들 것을 강조한다.



전업작가라면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일정한 시간을 두고, 그 시간에는 글쓰기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꼭 글을 써야 할 필요는 없어요. 내키기 않으면 굳이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물구나무를 서거나 바닥에서 뒹굴어도 좋아요. 다만 바람직하다 싶은 다른 어떤 일도 하면 안 됩니다. 글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잡지를 훑어보거나, 수표를 쓰는 일도 안 돼요. 



'글을 쓰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말 것.'

하루키는 이 글을 소재로 '챈들러 방식'이라는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글을 쓴다는 하루키는 정말 챈들러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어떤가?

글 쓰려고 앉아 있다가 막힐 때면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들춰본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두세 시간은 충분히 책상에 앉을 수 있다. 시간이 없어서 글을 못 쓴다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핑계인지 나는 알고 있다. 오늘부터 당장 실행해야겠다.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면 글만 생각하기. 수업 시간이 지루하면 멍을 때릴 순 있지만 핸드폰이나 만화책을 보면 안 된다. 



스스로 터득할 수 없는 작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움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중략- 분석하고 모방해 봐요. 다른 교육은 전혀 필요 없습니다.



글쓰기에 많은 돈을 들이는 사람들에게 챈들러는 자신이 스스로 터득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책은 읽지 않으면서 글을 잘 쓰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있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는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사람을 조금 더 깊게 알 수 있는 책이었다. 편집자 후기에서 편집자는 이렇게 썼다. "챈들러와 하루키의 오랜 팬으로서 만드는 동안 많이 신났고 때때로 짜릿했습니다. 저는 그랬어요."  독자로서 답하고 싶다. "챈들러를 더 깊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책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쓰는 글이 어떤 건지, 자신의 생각을 글로 완벽하게 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편집자가 신나서 만든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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