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마누 Feb 08. 2024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소설가 정유정이 말하는 소설 쓰기의 모든 것

소설은 어떻게 쓰이는가


정유정의 소설 <28>과 <종의 기원> 두 권을 읽었다. 그 후, 정유정의 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과 <완전한 행복>을 연달아 읽었다. 정유정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그가 만들어낸 세상 속에 깊숙이 빠져 들어가는 경험을 했다. 그가 만든 세상은 소설이라는 걸 잊게 만들 정도로 생생했으며,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몰입감이 장난 아니었다. 완벽하게 만들어진 인물들은 책을 펼치는 순간 끝날 때까지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읽는 내내 불편했지만 중간에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던 이야기. 정유정이라는 작가가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길래 이렇게 아프고 힘든 소설을 쓸까? 쓰고 나서 괜찮을까?




정유정은 간호사 5년,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에서 9년 넘게 일하며 한 집안의 가장으로 이십 대를 보냈다.  막내 동생이 군대에 가자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6년간의 습작, 11번의 공모전 낙선 끝에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로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청소년 관련 소설의뢰가 계속 들어오자 다시 칩거에 돌입, 3년 후 <내 심장을 쏴라>로 제5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7년의 밤>과 <28>, <종의 기원>은 주요 언론과 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면 큰 화제를 모았고, 미국, 프랑스, 독일, 중국, 대만, 일본 베트남 등 해외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며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외에도 에세이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출간했다.



인간을 모르면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없다.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다독은 필수다. 인간을 모르면서 인간에 대해서 쓸 수는 없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의 경험이 자신을 타자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그 외에도 양적풍요를 넘어 다양한 분야를 두루두루 접해보는 것이 좋다. 식물학, 동물학, 심리학, 생물학에 대해 공부했다. (본문 중)


기지도 못하면서 날려 든다-어느 심사위원의 심사평

공모전에 연거푸 떨어지다 처음으로 공모전 예선점을 통과하고 받은 심사평.

"이 작가는 기지도 못하면서 날려든다"

개나 소나 문학한다고 덤비는 현실이 슬프다는 한탄 뒤에 들은 말이라 더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헌책방에서 '사계'책을 발견하고 밤새 읽은 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헌책방에서 절판된 스티븐 킹의 소설을 모조리 사 모았다. 읽고 분석하고 필사하며 이야기가 무엇인지 배워나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소설작법서, 시나리오 작법서를 뒤지면서 이야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익힌다.

(본문 중)



정유정의 소설에 악인이 많은 이유

악인이 주인공의 적대자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심지어 <종의 기원>에서는 악인이 주인공이다.

그 이유가 뭘까?


정유정은 인간 본성의 어둠과 그에 저항하는 자유의지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인간이 가진 이중성. 숨겨져 있는 질투와 시기, 분노, 증오, 혐오와 욕망 쾌락과 공포, 절망 등이 깨어나는 조건.  그것이 운명적 폭력성과 결합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과연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극복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적절한 소재와 결합되는 순간 정유정의 이야기는 탄생한다.



소설의 소재는 어떻게 찾을까?


질문에서 시작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혹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답을 찾아간다. 곰곰이 끈덕지게 '사실'의 이면에 도사린 '무엇'을 상상해야 한다. 소설적 질문들이 되풀이되다 보면 '어떤 질문'이 턱 걸린다. 그것이 소설을 시작하게 만든다.


"만약 우리 인생에 스프링캠프가 있다며?" -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심장을 쏴라.


아파트 게시판에 붙은 열한 살 사내아이를 찾는 전단지-7년의 밤의 모티브


구제역으로 수백만 마리의 돼지와 소가 생매장당한 사건을 보며 "만약 소나 돼지가 아닌 반려동물과 인간 사이에 구제역보다 더 치명적인 인수공통전염병이 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 28


94년 봄 한국을 충격과 혼란에 빠뜨린 살인자 ' 어떤 인간이기에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저 평범해 보이는 겉모습 안에 '무엇'이 살고 있을까? 그것이 튀어나오게 만든 방아쇠는 무엇일까" -종의 기원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는 정유정의 소설을 6권 읽고, 정유정이라는 작가에 대한 강한 호기심에   집어든 책이었다. 전문 인터뷰어인 지승호가 묻고 소설가 정유정이 답하는 형식이다. 마치 북콘서트 참가자처럼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소설 속 공간은 하나의 세계다



초고를 쓰기 전에 개요작성하고 자료조사한다. 이야기의 기본이 되는 지식, 이야기 속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자료조사가 필요하다


"작가는 자기가 만드는 세계에 대해 신처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다. 내가 만든 세계에선 파리 한 마리도 멋대로 날아다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소설은 시공간을 단단하게 축조하는 일로 시작된다. 뒤집어 말하면 구체적으로 완성된 시공간 없이는 작업을 진행할 수 없다. 나 자신이 완전한 세계로 들어가 세계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인물을 적절하게 배치할 수 있다.


소설의 내적 규칙


작가는 '무엇을 쓸 것인가'와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를 제대로 해내려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방식과 자신의 이야기가 '말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 현실세계의 규칙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내적 개연성은 소설 내에서 일어난 사건의 인과관계를 말한다.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다"이 문장에 논리적으로 결함이 없으면 내적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라 밑줄을 그을 수가 없어서 필사를 하는데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 윗부분이 움푹 파여서 굳은살이 생겼다. 세 장을 넘기며 필사를 하다 말고, 책을 사자. 이건 소장용이야 하며 겨우 필사를 멈췄다.


소설을 시작하는 6가지 질문


등장인물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들은 왜 그것을 원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그것을 성취하는가


그들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 6가지 질문에 나만의 정답이 정해질 때 비로소 나만의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한다고 해서 당장 정유정처럼 소설을 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어떻게 소설을 써야 하는지 감을 잡았다. (언제까지 감만 잡고 있을 건지.)


 이 책을 읽은 지 일 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생각,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만든 인물들은 평면적이다. 아무 문제도 없다. 그래서 글이 재미없다. 소설조차 나는 예쁘고 좋은 것만 쓰려고 한다. 내가 쓴 글을 읽고 누가 날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런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야한 글을 쓰고 싶은데,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데, 나쁜 짓을 해야 하는데, 욕도 하고, 누군가를 괴롭히기도 해야 하는데 못 쓰겠다. 쓰려다 멈칫한다. 소설과 나를 분리시키지 못한다. 자꾸 소설 속 인물을 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설이 에세이 같다.


기억하자. 소설을 쓰는 건 나지만 내가 소설 속 인물은 아니다. 나는 창조자다. 내가 만든 세상에서 내가 만든 인물들이 움직인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이전 05화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레이먼드 챈들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