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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Feb 15. 2024

착각

시아버지가 큰 아주버님에게 나 몰래 돈을 줬다. 시누이는 내가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화를 냈다. 어젯밤 잠을 설치고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 한참 꿈속을 헤매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비몽사몽 전화를 받았다. 시누이는 다짜고짜 알고 있었냐고 물었다. 꿈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팠다. 일요일 아침 7시였다.


  나는 막내며느리다. 큰 아주버님은 직장관계로 육지에 나가 살고 있다. 시아버지가 일충에, 나는 이층에 살고 있다. 사글세값은 근처 부동산시세와 똑같이 낸다. 언젠가 형님이 동서는 집세가 안 들어가잖아.라는 말을 했다. 나는 웃으며 왜요? 아버님한테 사글세 내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형님은 그래봤자. 얼마나 되겠어. 하는 표정으로 육지의 집값이 얼마나 비싼지, 생활비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말했다. 나는 그렇게 힘들면 내려와 살면 되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다.


   2남 1녀 중 장녀인 시누이는 성질이 급하고 말이 빠르다. 그나마 시댁에서 나를 제일 생각해 주는 사람이다. 아니다. 시누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 형님과 아주버님이다. 욕심만 세고, 할 일은 똑바로 하지 않는다며 나만 보면 욕을 한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가 시아버지네 이층에 올라가 살면서 나는 시아버지의 밥과 청소, 병원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시누이가 하는 얘기를 듣다 보니 나도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큰아들이 하는 게 뭐가 있길래 아버님께 당당히 돈을 요구한단 말인가. 나는 오십이 다 되도록 사글세에 살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제사 명절 내가 다 차리고 형님네는 일 년에 한 번 내려올까 말까 하는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면 생각보다는 감정이 앞선다. 

  

 시누이 전화를 끊고, 일층으로 내려갔다. 어제 끓여놨던 감자탕을 들고 내려가 데우는 동안 아버지 앞에 앉았다.

"아버지, 형님네 집에 돈 주셨어요?"

아버지가 신문을 읽다 말고 쳐다본다. 25년 째다. 아버지도 내 성질을 알고, 나도 아버지를 안다.

"왜 그러셨어요? 돈 주면 잘할 거 같아요? 돈 받으면 또 날려 먹을 거 알잖아요. 그 돈 있으면 나나 주지. "

시누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시아버지에게 쏟아냈다. 여든이 넘으면서 말수가 적어진 아버지가 눈만 깜빡거린다. 귓불을 문지른다. 큼큼 헛기침도 한다. 내 눈에는 그게 다 연기 같았다. 섭섭했다. 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돈 가져가는 사람 따로 있나 싶어 화가 났다. 이게 다 남편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서럽기도 했다. 이럴 때 남편이라도 옆에 있으면 든든했을 건데 남편은 일 년에 한 번 집에 온다. 한번 오면 한 달은 머물고 가지만 지금은 올 때가 아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나는 아버님의 삼시 세 끼와 운전수다. 당당하게 말할 자격이 있다.

   

가스불을 끄고, 감자탕을 그릇에 담고 아버지를 불렀다. 천천히 걸어온다. 나는 "식사하세요."라고 말한 후, 눈도 마주치지 않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날 저녁 아버님이 목욕탕에 간 사이 청소를 하러 내려갔다. 아버님은 평생 일기를 쓰셨다. 공직자로 은퇴할 후에도 여든이 넘은 지금도 일기를 쓰신다. 아버님 방을 정리하는데 앉은뱅이책상에 일기가 있었다. 일기를 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은 궁금했다. 

 

 연정이가 아침에 나에게 화를 냈다. 왜 돈을 수현이에게 다 줬냐며 따졌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큰아들이다. 수현이가 잘 되길 바란다. 이 집도 수현이에게 물려줘야 한다. 지금은 연정이가 제사를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수현이네가 내려올 것이다.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아들의 일기장을 훔쳐볼 때보다 가슴이 더 뛰었다. 25년째 아버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래도 나는 작은며느리일 뿐이다. 내가 해주는 밥을 먹고, 청소한 집에 살면서 먼 곳에서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큰아들네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버님은 내게 준 돈을 모두 적고 있었다. 제사와 명절 때, 그리고 소소하게 아이들에게 건네는 용돈까지. 아버님은 날짜와 금액을 적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받을 때는 자잘하게 보였는데, 한꺼번에 보니 제법 큰돈을 받고 있었다. 내가 준 것만 생각하고 해 준 것만 기억하고 살았다. 아버님도 똑같았다. 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해 준 것만 기록했다. 두 사람이 서로 해 준 것만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번만큼은 큰 아주버님이 아버님 돈을 잘 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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