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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Dec 21. 2023

팔불출입니다

여자가 웃는다. 혼자 실실 웃는다. 새어 나오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여자가 혼자 웃는다.


여자는 남자에게 말했다. 오래전 첫 아이가 6살 즈음.


초등학교 때는 학교공부 외에 따로 공부를 시키지 않겠다. 대신 예체능을 시킬 것이다. 초등학교 교육을 못 따라올 정도의 머리라면 공부를 많이 시킬 필요가 없다. 예전처럼 공부만 잘한다고 되는 세상이 아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세상에 적응을 잘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남자도 여자의 말에 동감했다.


여자는 큰 딸이 6살이 되자 피아노를 샀다. 발레학원을 보냈다. 그 모든 것이 여자의 로망이었다. 한자 학습지를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여자는 유명성악가가 지휘자로 있는 합창단에 딸을 데리고 갔다. 오디션을 보는 날 여자는 딸의 손을 잡고 괜찮다고 했다. 정작 사시나무처럼 떨렸던 사람은 여자였다.


딸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합창단활동을 했다. 무대에 서면 빛나는 아이였다. 6살 때부터 발레를 해서 해마다 정기공연을 했다. 여자의 욕심으로는 발레 고급반까지 갔으면 했는데 중금반에서 멈췄다. 딸은 배에 힘이 없었고 따라서 발레기술을 소화하지 못했다. 아쉬웠지만 6년 만에 발레를 그만두었다.


6살 때 시작한 피아노는 6학년때까지 배웠다.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 선생님한테 얘기했다. 취미로 하는 것이니 좋아하는 노래를 반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여자는 딸이 피아노를 즐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피아노선생님도 그런 여자의 마음을 잘 알았다. 딸이 좋아하는 곡 위주로 진도가 나갔다. 딸은 지금도 우울하거나 속상할 때는 피아노를 친다.


2학년부터 6학년때까지는 학교에서 오카리나 동아리활동을 했다. 친한 친구의 공연을 보고 딸이 하고 싶다고 해서 선택한 활동이었다. 네가 선택한 일이니 책임을 지라고 했다. 딸은 일요일 저녁 3시간씩 연습했다. 양로원공연을 다니면서 오카리나실력이 향상됐다.



8살부터는 수영을 배웠다. 4명이 정원인 수영교실이었다. 물을 무서워하는 딸은 10개월 동안 음파만 했다. 수영강사선생님의 전화를 받으면 여자는 항상 괜찮다고 말했다. 어느 날 잠수를 하고 자유형을 배우더니 딸은 5학년까지 수영을 배우면서 접영까지 완벽하게 마스터했다. 자유형을 하는 딸을 보기만 해도 여자는 기분이 좋았다.


5학년부터는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적어도 악기를 2가지 이상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던 여자는 딸에게 바이올린 선생님을 붙여줬다. 젊고 활기찬 선생님은 일주일에 두 번 집에 와서 레슨을 했다. 딸아이는 여자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바이올린 선생님에게 털어놓았다. 딸의 숨구멍 같았다. 1년이 지나고 여자는 바이올린 앙상블에 딸을 넣었다. 지휘자선생님이 밝고 좋았다. 딸은 지금 3년째 앙상블 활동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2 바이올린 리더가 됐다.


바이올린을 하자 중학교 동아리도 현악기 연주반에 들어갔다. 매주 수, 목요일 아침 40분 연습하고, 토요일 오전 두 시간씩 연습한다. 딸은 중학교에서는 1 바이올린이라며 좋아했다.



미술학원도 6년을 다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전도 미술대회에서 도지사상을 받은 이후 딸은 자신감이 붙었는지 장래희망을 화가라고 당당히 적어냈다. 여자는 웃으며 딸에게 뭐든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고 했다.


이틀 전 딸의 중학교 첫 시험이 끝났다. 8과목 중에 3문제가 틀렸다. 반에서 1등이라고 했다. 여자는 딸이 기특해서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뻤다. 초등학교 엄마들  모임에서 여자는 별난 엄마였다. 국영수학원을 보내지 않는 유일한 엄마였다. 다른 엄마들은 여자에게 지금이라도 영수학원을 보내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웃기만 했다.


불안한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고등학교 수학문제를 푼다는 말을 듣는 순간 여자는 딸이 학교수업을 못 따라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는 딸을 믿었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딸은 수업에 충실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배우기 때문에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선행을 한 아이들이 수학시간에 딴짓을 하고,  잠을 잘 때 딸은 수업에 집중했다.


결국 태도의 문제였다. 딸은 한 번도 선행을 하지 않았지만 매일 집에서 한 시간가량 문제집을 풀었다. 공부할 분량이 정해져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공부를 한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었던 딸은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역량을 알게 모르게 키우고 있었다.


여자가 해 줄 수 있었던 건 딸이 공부를 하기 전에 다양한 경험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오늘 딸이 말했다. "엄마, 친구가 나보고 재능부자래.  그림도 잘 그리고, 악기도 잘하고, 체육도 잘하는데 공부도 잘 한대." 여자는 딸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너무 좋았다. 여자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설령 나중에 딸의 성적이 떨어져서 실망할 일이 생긴다 해도 지금 이 순간 행복했기 때문에 여자는 딸에게 만족하기로 했다. 여자는 열심히 엄마를 믿고 따라온 딸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여자는 지금 이 순간 딸이 빛나는 지금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소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눈이 많이 오는 저녁이다. 아이들의 이런저런 소리가 들리고 뉴스는 언제나 진지한 소식을 전하고, 남편은 여전히 말없이 티브이를 보는데 여자는 맥주옆에 두고 노트북 앞에 앉아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있다.


내일 눈이 소복이 쌓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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