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수집가
어머니는 여전히 행복했다. 이젠 완전히 누운 채로 대소변을 받아내게 하고 쉴 새 없이 헛소리를 해대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지루하지 않게 했다. 면회를 갈 때마다 도무지 철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아들도 어머니의 삶을 지리멸렬한 것으로 떨어뜨리지 않게 도왔다. 부쩍 말수가 줄고 홀로 처박혀 있기를 좋아하는 나, 안진진의 우울도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 준다. 아버지 시중 때문에 결국 어머니는 가게에 점원 한 사람을 두었다. 얼마 되지 않는 수입에서 점원 월급까지 나가야 하니 그것 또한 어머니의 나날을 긴장으로 채워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더욱 바빠졌고 나날이 생기를 더해갔다. 아, 어머니의 불행하고도 행복한 삶,........
양귀자의 <모순> 中 P.293
-내가 웃긴 애기 하나 해 줄까?
-뭔데?
-웃기다기보다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랑 같이 일하는 사람 얘긴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브런치를 하고 있었다. 대학병원 간호사인 친구가 말을 꺼냈다.
출처 : pixabay-같이 일하는 간호사 중에 우리 또래가 있는데 걔가 딸 넷 낳고 아들을 낳았어.
-그래?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구나.
-시댁이 부잔가 보다.
-부자는 무슨. 집도 없이 결혼한 남자였어. 외동아들이라 시댁에서 손주를 원했나 봐.
-그래서 지금 5명이야?
-응, 8년 동안 다섯을 낳았어. 심지어 5명을 낳을 때 휴가도 안 썼어요. 몸 추스르고 딱 한 달 있다 병원에 나온 거 있지.
-대단하다.
-더 대단한 게 뭔지 알아? 얘가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래서 친정 옆에 집을 얻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허리가 아프다는 거야.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글쎄 루게릭병이었던 거지.
-헐.
-임신해서 배가 남산만 한 얘가 걷지도 못하는 친정엄마를 모시고 서울에 있는 병원에 왔다 갔다 하면서 어머님 병시중을 다 들었어. 그 와중에 얘기 낳고, 출근하고.
-남편은?
-아무것도 안 도와줬지.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동생들이 친정집을 팔려고 하니까 제 가격을 주고 동생들한테 샀대. 친정집에서 애 다섯을 낳은 거야.
-대단하다.
-근데 친정집이 좁은 거지. 애들이 커가니까
-그렇겠지. 애 하나만 있어도 집이 좁은데 5명은 어휴.
-그래서 얘가 부동산에 눈을 뜬 거야. 시내에 있는 공터를 사서 거기다 5층 건물을 올렸다는 거 아냐
-와, 여자가 멋있다.
-에이, 남편이 도와줬겠지.
-아니야. 남편은 그냥 일하고 술 마시느라 집에도 잘 안 들어왔다니까. 집에 들어올 때마다 아이만 생기고.
-뭐야. 그럼 혼자 다 했다고?
-그러니까 대단한 거지. 1층은 상가로 임대하고 2,3,4층은 사글세로 5층은 복층으로 해서 자기들이 사는 거야. 큰길 옆에 있는 건물이야. 지나가면 보여.
어느새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친구의 동료 이야기에 심하게 몰입하게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남편이 도와주지 않으면 그렇게 못 해.
-돈관리를 여자가 하면 가능하지.
-맞다. 맞아. 남편이 아무것도 안 하면서 일일이 터치까지 하면 못 살지.
-그건 그래. 그 남자가 3살 연한데 아무것도 간섭을 안 한대. 일체 도와주지도 않고.
-그거네. 그럼 가능하지. 힘들어도 자기가 알아서 하면 할 만 해.
-그래도 힘들었을 거야. 애 다섯을 키우면서 그 힘들다는 대학간호사로 일하면서 건물 세우고 세 받는 것까지.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더 웃긴 얘기 해 줄까? 힘들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댁이 건물 올리니까 떡하니 한 층 내놓으라고 해서 지금 3층에 시동생이랑 시부모가 들어와 살아요. 아이들 통학 도와준다는 핑계로.
-공짜로?
-응. 관리비 한 번 안 내고.
-와, 그 여자 정말 어떤 살맨?
-우리 땐 MCM이 구찌고 루이비통이었어. 알지?
-알지. 뽄쟁이들은 다 그 가방 들고 다녔잖아
-우리 병원에서 MCM가방 제일 먼저 들고 다녔던 아이야. 풀메이크업 아니면 출근을 안 했다고.
-지금은?
-지금은 세수만 대충 하고 나와. 정신없어 보이긴 해
-그러겠지. 세 사람 몫을 혼자 다 감당하고 있으니.
-그래도 힘들다는 소리 한번 안 한다. 자기는 괜찮대. 남편도 좋고. 시어머니도 좋고
-아이들은? 잘 크고?
누군가 시크하게 물었다. 뭔가 부정적인 말 하나는 들어야겠다는 심보가 묻어 있었다.
-큰 딸이 이번에 과학고 들어갔어.
-아.
누구도 그 말에 대꾸를 하지 못했다. 약속한 것처럼 우리는 물 한잔씩을 마셨다. 지금까지 우린 뭐 하고 살았나 하는 마음과 내가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은 생각. 몸이 아프다는 말도 한가해야 나오는 거구나 싶어 온종일 나와 있던 입들이 쏙 들어갔다.
그날 집에 오고 나서도 친구의 동료얘기가 계속 떠올랐다. 그때 마침 양귀자의 <모순>을 읽었다.
아, 그 사람은 안진진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었구나. 힘들 때일수록 살아갈 힘이 나는 사람. 힘들어 죽겠다고 하면서 웃고 있는 사람. 그렇게 힘들면 쉬라는 말에 펄쩍 뛰며 견딜만하다는 사람. 그러면서 주위를 살피는 사람.
출처 : pixabay나는 소설 속에서만 있을 것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친구를 통해 들으며 소설보다 더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내가 친구의 동료 얘기를 소설로 쓴다면 안진진의 엄마만큼이나 모순으로 가득 찬 인물이 될 것이다. 독자들은 아마 이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소설 쓰고 있네.라는 말은 거짓말하지 마.라는 말과 통한다. 정작 삶은 이토록 다양하고 소설같이 흥미진진한데도 불구하고.
내가 자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다. 도무지 이야깃거리가 없는 나는 이렇게 재밌는 사람을 만나면 지나칠 수가 없다. 언젠가 이야기로 만들 생각에 하나씩 모아두고 있다. 그날이 빨리 오길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