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많이 내리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8시에 아침을 먹고 8시 30분에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9시에 시작하는 방과 후수업이 있다. 세 아이의 학교는 동서방향에 있었고, 누군가는 일찍 도착하지만, 마지막 한 명은 약간 늦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비와 함께 바람이 많이 불었다. 우산으로 장난하는 아이들을 재촉하며 걸음을 빨리 했다. 집에서 5분 정도 떨어진 학교주차장까지 가야 했다. 남편의 차는 집 앞 주차장에 있지만, 좁은 골목을 들어오지 못하는 나는 항상 학교주차장을 이용한다.
장난치는 아이들에게 눈을 흘기며 학교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없었다. 교문입구는 물론 안쪽 주차장에도 내 차가 없었다. 가슴이 내려앉으면서 정신이 멍해졌다. 뭐지? 왜 없지? 내 차가 어디 있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데 무슨 생각이라도 해야 했다. 내 뒤로 나보다 더 당황한 얼굴의 아이 셋이 서 있었다.
-맞다. 엄마가 **빌라옆에 차를 세웠어. 미안해. 얼른 가서 차 가지고 올게.
생각났다. 집 앞 빌라옆은 평소 주차경쟁이 심한데, 어제 딱 자리가 있었다. '내일 아침 일찍 갈 거니까 여기 세워야겠다.'라고 생각했건 게 떠올랐다. 아이들을 안심시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미친년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 미쳤나 봐. 무슨 정신이지? 왜 이래, 정말?
다행히도 신호가 빵빵 뚫려서 마지막 아이는 10분정도 늦게 도착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엄마들 모임에 참석했다가 11시 30분에 집에 가서 서둘러 점심준비를 했다. 1시 30분에 수학학원에 가는 큰 딸과 2시에 수영장에 가는 둘째, 셋째를 챙겼다.
수영장에서 돌아오니 4시였다. 30분 잠을 자고 일어났다. 4시 30분에 남편 드럼연습장에 데려다 주고, 집에 와서 아이들을 바이올린연습실에 데려갔다. 그리고 기다리다 집에 오니 이 시간이다.
점심준비를 하다 12시에 끝나는 아들을 데리러 가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아침에 주차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순간 아무 생각도 안 나서 무서웠다고 말했다. 남편은 안 그래도 텔레비전 건강프로에서 초기치매증상 5가지가 나왔는데, 내가 5가지 다 해당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당장 다음 주에 치매검사를 하자는 것이다. 요즘 들어 낮잠 자고, 짜증이 늘고, 잊어버리는 일이 많은 게 이상하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왜 이러냐 싶을 때가 있다. 세수하고 나와서 스킨을 발랐는지, 로션까지 발랐는지 까먹을 때가 있다. 어떤 날은 로션만 세 번을 바른 적도 있었다. 옆에 있던 막둥이가 엄마, 아까 로션 발랐는데 왜 또 발라요? 물어볼 때까지 몰랐다.
겁이 덜컥 났다. 증상을 찾아보니 다 내 얘기 같았다. 요즘 들어 머리가 심하게 아플 때가 있었는데, 증상 중 하나인가 싶었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차 안에서 간호사친구에게 전화해서 지금 상황을 말하고, 어디 가서 무슨 검사를 할까 물어봤다.
친구는 내가 과부하에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쓰는 글을 모두 찾아보는 친구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뭘 하며 사는지 빤히 알고 있다. 세 아이들을 케어하면서, 집안 일도 혼자 하는데 글 쓰고 책 읽고 포스팅하고, 인스타에 업로드까지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을 끓이면서도 무슨 글을 쓸까 생각하다 물이 졸아들 때까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몸이 하는 게 다르니 자꾸 어긋나고, 똑바로 못하게 되는 것이라며, 큰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검사해 보는 건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남편은 내가 뭘 잊어버릴 때마다 머리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쓸데없는 생각 하느라 중요한 걸 까먹는다고 불평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뭘 하고 싶은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할 때면 마음이 아프다. 속상하다. 굳이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남편이 조금만 도와주면 덜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고 싶은 것이 없을 때는 독박육아나 전업주부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지금은 집중해서 글 쓸 시간이 딱 4시간만 있으면 좋겠다. 나를 안 부르는 시간,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4시간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 시간도 아깝다. 언제 나를 부를지 모른다. 그래서 항상 생각해야 한다.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글을 먼저 쓰고, 이렇게 다들 티브이에 빠져 있을 때 후다닥 쓴다. 쓰고 다시 고칠지 언정 일단 쓰고 본다. 다행인 건 어떤 속상하거나 힘든 일도 쓸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하루를 기대했다면, 요즘은 폭풍우몰아쳐 바람 불고 잎이 다 떨어지면 그걸 어떻게 글로 쓸까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스킨을 두 번 발랐는지 세수는 했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친구는 중심을 잘 잡으라는 말과 응원한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고, 나는 오늘 일을 어떻게 글로 쓸까 생각하며 아이들을 픽업했고, 집에 오자마자 이렇게 글로 썼으며, 바쁜 하루였지만 글하나를 썼으니 됐다고 자족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나저나 남편이 끝까지 치매검사하러 가자고 하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