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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May 15. 2024

돋보이고 싶은 마음

중학교 2학년 때, 초등학교 5학년이던 동생이 나와 키가 같아졌다. 내 키는 멈췄는데, 두 명의 동생은 쑥쑥 잘도 자랐다. 큰언니의 체면이 구겨졌다. 엄마와 나는 키가 똑같은데, 동생 둘은 우리보다 8센티가 컸다. 가족사진 속 나는 언제나 발을 들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동생들이랑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었다. 분주하게 발꿈치를 올리고 내리면서도 표정은 아닌 척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했다.


그게 평생 내 모습이었다. 그리고 고민이었다. 나는 그게 아닌데, 사람들이 말하는 나에 맞춰 산다는 건 내면에 수많은 자아들을 숨겨 놓은 것과 같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바라는 모범생으로 친구들 사이에서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고 싶었다. 아닌데. 난 전혀 아닌데.


초등학교 6학년때까지 나는 지독한 악필이었다. 생각이 나오는 대로 글을 쓰곤 했는데, 손이 글을 따라가지 못해서 기호처럼 글을 썼다. 내가 쓴 글을 가져간 선생님은 반에서 제일 글씨를 잘 쓰는 친구에게 다시 쓰라고 했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쓴 글은 분명 내가 쓴 게 맞지만 낯설었다. 제목 아래 내 이름을 적고, 대회에 보냈다. 도지사상을 받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중학교 때 영어선생님이 점심시간에 불러서, 영어편지 쓰기 대회가 있으니 글을 한 편 써오라고 했다. 중학교 들어가서 알파벳을 처음 배운 나는 교과서도 더듬더듬 읽고 있었다. 못 한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한글로 쓰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미국에 있는 가상의 친구에게 편지를 썼고, 영어선생님이 영어로 바꿔서 대회에 보냈다. 교육부 장관상을 받았다. 전체조회시간에 단상에 올라가 교장선생님에게 상을 받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영어를 잘 하는 줄 알았다. 부끄러웠다. 


그 후로 혼자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아예 안 하는 사람이 되었다. 비밀은 달콤하지만, 비겁하고 부끄러운 비밀은 마음을 좀먹는다는 걸 알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진실을 따라가고 싶었다. 만나서 의미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임보다 가끔 만나도 마음을 터놓는 사람들이 좋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정의, 가치, 자아와 같은 무겁고 강한 단어의 힘을 좋아한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팀을 만들고, 6월에 열리는 대회준비를 하고 있다. 학교에서 만나는 걸로 모자라 주말에도 두 시간씩 만나 연습 중이다. 6명의 아이들과 6명의 엄마들이 모일 곳을 찾다 보니 장소가 여의치 않아서 집마다 돌아가며 연습실로 쓰고 있다. 친하지 않은 엄마들이었는데, 같은 목표를 가졌다는 이유로 급속도로 친해지고 있다. 


나는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아이들의 학업이나 대회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 편이다. 대회가 있으면 데려가긴 하지만, 손을 보탠 적은 없다. 예전에 내가 어른들에 의해 만들어진 아이여서 그랬는지 모른다. 당장 1등을 하는 것보다 자신만의 실력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엄마들은 나와 달리 아주 적극적이다. 모든 것에 관여했다. 아이들만으로는 할 수 없는 대회라며 팔을 걷어 부쳤다. 다른 팀은 학원 선생님이 붙었다는 말도 들었다. 아이들의 대회에 어른들의 개입이라니. 이게 그래도 되는 건가 말을 꺼냈다가 눈총을 받았다.


초등학교 대회이면서 아이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게 이상했다. 아이들의 실력을 보기 위해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을 주는 대신 잘 짜인 대본을 던져주면서 그대로 해 보라고 말하는 게 과연 옳은 걸까.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 나도 그 안에 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하지 못한 말을 글로 쓴다. 


언젠가 누군가가 마이크 앞에서 "돋보이고 싶은 마음에 한 행동"이라는 말을 했다. 누구나 돋보이고 싶어한다. 특별하고 싶고, 존경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당장 눈에 보이는 이력서나 학벌이 아니다.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만나는 그 사람만의 인성에 끌린다. 따뜻하고 다정한 눈빛, 작은 손놀림, 대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어떤 행동들은 나만 아는 것이지만 마음을 꽉 채울 만큼 크고 강한 힘을 가진다. 만들어진 향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의 향기만으로 주변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들은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팀에서는 각자의 역할이 있고, 제 몫을 해내야 한다. 나는 직접 도와주진 못하지만, 아들이 "엄마"를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 언젠가 홀로 우뚝 서 있을 아이들을 위해 엄마로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즘 나의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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