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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Aug 17. 2024

그럴 때가 있다

언제부턴가 검은 옷을 사기 시작했다. 철마다 입을 수 있는 검은 옷들을 걸어놓고 연락이 오면 입는다. 차려 입은 것 같지 않으면서 적당히 예의를 갖춘 것 같은 옷을 산다. "이거 상갓집에 입고 가도 될까요?"


살다 보니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삼시세끼 밥때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는 때처럼 살아가는 일에도 때가 찾아온다. 결혼할 때, 아이를 낳기 적당할 때,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가 있다.


낼모레 오십을 앞둔 나는 검은 옷이 필요한 나이가 됐다. 장례식장에 많이 간다. 내가 결혼할 때는 친구들도, 사촌들도 모두 결혼할 때라 밝고 화사한 옷들을 샀다. 아이 돌잔치를 할 때만 해도 다이어트를 하고, 미용실에 가는 걸 멈추지 않았다. 활짝 피어난 꽃처럼 밝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요즘은 사진찍는 게 싫어졌다. 아무리 운동을 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 끼니를 거르며 하는 다이어트는 도저히 못 하겠다. 한끼만 먹지 않아도 힘이 빠진다. 군것질을 즐기진 않는다. 빵은 소화가 힘들고, 냉동실에 가득 있는 제사떡은 먹으면 답답하다. 이상하게 먹으면 졸리다. 당연한 거라고 누군가 말했다. 


몸이 조금씩 처진다. 임신했을 때도 붓기가 없었는데, 요즘은 아침마다 손가락 열개가 오뎅이 된다. 일어나기 전에 팔을 쭉 뻗고 열손가락을 편다. 짧고 굵다. 폈다 오므렸다를 부지런히 하다 보면 잠이 서서히 깬다. 


남편은 사촌형제들이 많다. 시아버지는 1남 6녀였고, 시어머니는 5남3녀였다. 처음 결혼하고 인사를 드리는데 누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고개만 숙였다. 나를 제수씨라 부르는 사람들 중에 제일 살가운 사람이 있었다. 남편의 고종사촌이자 열 살이 많은 분이셨는데, 형님이 나와 성이 같았다. 나는 맘 속으로 그 아주버님의 이름만 기억해놓았는데, 그 후부터는 아주버님이 먼저 나서서 나를 챙겨줬다.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먼저 안부를 물어주고, 집안의 대소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석했다. 모든 집안 행사에는 그 아주버님이 계셨다. 자칫 어색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도 아주버님은 센스있는 말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런 사람이 있다. 있으면 괜히 마음이 놓이고, 없으면 찾게 되는 사람.


어제 남편과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다녀왔다. 3박4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소식을 들었다. 그 아주버님이 쓰러져서 중환자실에 있는데,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은 순간 남편을 쳐다봤다. 황망한 얼굴로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의 면회는 9시부터 9시 30분이었다. 보호자 두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서울에서 내려온 큰아들과 형님이 들어갔다. 우리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초췌한 얼굴의 형님이 잠시후에 나왔다. 형님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나왔다. 나만 보면 밝게 웃으며 "어떵살맨?"하고 묻던 형님이었는데, 푸석한 얼굴의 형님과 눈이 마주치자 마음이 서늘해졌다. 


-의사가 결정하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큰아들은 다른 병원에 가보자고 하고, 작은 아들은 의사말을 따르자고 하는데, 아고. 세상에.


8월 4일 아주버님은 초등학교 동창들과 오름에 올랐다. 평소에도 오름등반을 즐겨하는 분이셨다. 아침마다 집 근처에 있는 종합운동장에서 한 시간걷기를 했고, 틈날 때마다 운동해서 육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날씬한 체형을 유지했다. 


아주버님은 오름을 내려오고 난 후 가슴통증을 호소했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응급실에 왔을 때, 연락을 받은 형님이 먼저 도착해있었다. 의식이 있었던 아주버님은 형님과 이야기를 나눈 후 급하게 시술에 들어갔고, 시술이 끝난 후부터 의식블명이 되었다.



형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급성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온 후, 뇌사상태가 됐다며 병원에서는 빨리 결정을 하라는 것이다. 숨 돌릴 새도 없이, 상황을 받아들일 새도 없이 뭘 자꾸 결정하라고 재촉한다며 형님이 한숨을 쉬었다. 


주책없이 눈물이 나왔다. 5월에 제삿집에서 만났던 아주버님이 떠올랐다. 아주버님은 내년부터는 각자 집에서 제사치르고 돌아다니지 말자고 말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처음 장례식장에 갈 때는 절할 줄을 몰라서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지금은 장례식장에 앉아 상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는다. 보리떡과 방울 토마토를 먹고, 바쁠 때는 구석에 앉아 커피를 타기도 한다. 익숙해졌다. 누군가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에. 함께 슬퍼하다 돌아서 내 삶을 살아가는 것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의 부고는 언제 들어도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무뎌지면서도 여전히 아프고, 알면서도 서럽고,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면서도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고 말한다. 누워 있는 사람보다 산 사람이 더 힘들다고 말한다. 중환자실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숨만 쉬고 있는 아주버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를 기억하기 위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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