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철살인의 대가
-오빠, 나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 지금까지 했던 방법으론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아예 처음부터 생각자체를 바꾸기로 했어.
-꾸며쓰니까 그렇지
-맞아, 진짜 하고 싶은 말은 하지 않고, 적당히 예쁘고 적당히 말 되는 글을 썼어. 그러니까 맨날 떨어지지.
그래서 지금부터는 솔직하게 써 보려고. 아주 더럽고, 냄새나고 어둡고, 가슴 아픈 글을 쓰고 싶어. 사람의 밑바닥까지 끌어내려가는 그런 글. 내 애기를 쓰는 게 아니라 상상하고 만들어진 글을 쓸 거야. 그래서 말인데, 오빠, 잘 들어봐.
-중년의 여자가 죽었어. 그런데 이 여자는 죽기 전에 빚이 많았어. 결혼해서 전업주부로 살던 여자는 언제부턴가 컴퓨터게임에 빠져 살았거든. 근데 오빠. 요즘도 게임에서 현질 하지? 채팅도 하나?
(남편은 한 때 컴퓨터 두 대를 돌리며 게임에 몰두했던 남자였다. 남편의 꿈은 컴퓨터 세 대를 사는 것이었고, 삶의 목표는 PC방 주인이었다. 5년 동안 세 남매를 태어나면서, 남편은 더 이상 컴퓨터게임을 하지 않고, 핸드폰게임으로 돌아섰다. 여전히 핸드폰 두 개를 돌리며 전쟁 중이다. 반면 나는 게임을 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못한다. 못하기 때문에 관심이 없다. 게임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재미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게임을 하지 않는 건 게임보다 더 재미있는 게 있기 때문이다.)
-돈으로 아이템을 사지. 단톡도 하고, 오프라인에서도 만나고.
-음, 다행이다. 이 여자는 게임을 하면서 어떤 남자를 알게 돼. 여자는 늙고 볼품없지만, 게임 속 캐릭터는 매력적이어서 인기가 많아. 그런데 남자는 다른 팀원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여자에게 다가와. 쪽지를 보내고 귓속말도 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기억하냐고 물어봐. 여자는 깜짝 놀라는데 왜냐하면, 남자의 이름은 대학 때 오랫동안 사귀었던 사람의 이름이었거든. 여자는 그때부터 바람피우듯 남자를 게임에서 만나는 거야.
-그러려면 뭔가 계기가 있어야지. 왜 어떻게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아는데?
-몰라, 나중에 생각할게.
-디테일하게 들어가야지. 예를 들어, 여자의 아이디가 예전에 썼던 거라던가. 여자가 하는 말 중에 힌트가 있었던가.
-오. 괜찮은데? 그런 얘기 계속해 줘. 너무 좋다. 암튼 그렇게 여자는 남자에게 빠져들어가는 거야. 남자는 예전 얘기를 하면서 여자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하지만, 여자는 만날 생각은 없었어. 그냥 게임상에서 보는 걸로 족하다고 생각했거든. 여자에게는 무뚝뚝한 남편과 고등학생 딸이 있고, 보수적인 성격이라 남자를 만나는 건 가정을 깨뜨린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거든. 게임상에서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여자는 남자가 돈얘기를 꺼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돈을 입금해. 암수술을 받은 여자에겐 보험료가 있었어. 통장에 돈이 떨어지자 여자는 물건을 처분해서 돈을 만들었어. 그렇게 일 년쯤 남자에게 돈을 줬는데, 한꺼번에 준 게 아니라 큰돈인 줄 몰랐던 거지. 어느 날, 경찰에게서 전화를 받고, 여자는 남자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았어. 여자는 남자를 고소하지 않았어. 왜냐면 여자는 알고 있었거든. 남자가 예전의 첫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좋았던 거야. 잊고 살았는데, 그 시절이 존재했다는 걸 되새겨준 남자에게 자신은 돈을 지불했다고 말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음, 인생의 허무? 중년의 우울함과 갱년기의 외로움? 마음이 비어 있는 사람의 이야기?
-그 여자는 무슨 게임을 했는데?
-응? 몰라. 생각안 해 봤는데?
-어떤 게임을 하느냐에 따라 여자의 성격이 다르게 나오지.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게임하고 연결시키려면 뭔가 폭력적인 게임을 하거나 전략적인 게임이거나. 이런 것도 다 생각하고 써야지. 무턱대고 게임하다 남자 만나서 사기당했다고 하면 그게 먹히겠냐?
-와, 오빠 정말 똑똑해. 완전 천재 같아. 지금. 멋있다.
-일단,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딱 정해놔. 그리고 어떤 사람을 주인공으로 쓸 건지 생각하고. 그 사람이 현실주의자고 냉혈한 성격인지, 감정이 앞서고 말이 많은지, 속이 검고 윰흉한데 환하게 웃는 사람인지, 인상은 더럽지만, 속은 따뜻한 사람인지 확실하게 정해. 그리고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타당한 이유를 만들어. 그러려면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 거 아냐. 아니면 의심하는 이유라도 있어야 행동이 납득이 돼지. 뭔가 걸리는 것이 있어서 지레짐작하고, 오해해서 일이 자꾸 꼬이게 만들어. 누가 범인인지 마지막까지 헷갈리게 하면 더 좋고.
-와, 오빠. 그냥 오빠가 다 말해주면 안 돼? 내가 글은 쓸게. 오빠가 말하면 내가 잘 만들어서 작품을 만드는 거야. 어때? 우리 완전 환상의 커플이 될 거 같은데.
-됐거든요. 드라마볼 때도 맨날 여자 예쁘다. 남자 멋지다. 옷 예쁘다 어디서 샀냐 하지 말고, 표정이나 말투, 하는 말을 듣고 생각을 하란 말이야. 응? 왜 저러는지. 왜 의심하는지. 왜 화내는지
-근데 오빠는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드라마.
-아. 역시
오빠와 차 안에서 소설에 대해 말하는 동안 집에 도착했다. 트렁크에서 종량제 봉투 네 개와 계란 한 판을 꺼냈다. 남편이 한 손으로 계란을 잡고, 한 손에 봉투 두 개를 들고 먼저 걸어갔다. 뒤따라가며 문득 남편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잊어버릴까 서둘러 글로 남긴다. 국문과를 나오면 뭘 하나. 문예창작학과에서 공부하면 뭘 하나. 일주일 내내 드라마를 챙겨보는 남편님에게 이론도 실기도 깨갱 인 것을. 헛살았다. 헛똑똑이였다. 다행인 것은 내가 반성을 잘한다는 것이다. 일단 잘못을 뉘우치고 나면, 똑같은 실수는 안 하게 된다.
오늘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았다. 그러므로 달라질 것이고, 좀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많이 봤던 거 같은데? 하다 보니 소크라테스가 떠올랐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질문자가 답을 가지고 대화자에게 문초하고 다그치면서 답을 따라오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에게 답을 가르쳐주는 데 있지 않고, 상대로 하여금 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혹시 우리 남편님 소크라테스였던 건가? 마음속으로는 한없이 존경하는 마음이 일었지만, 나는 결코 티를 내지 않을 것이다. 결혼 22년 차가 되면 밀당할 끈도 낡아져서 조금만 잡아당겨도 끊어질 모양새가 된다. 살살 당겼다 풀었다 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남편 덕분에 글 쓸 거리가 생겨도, 소설에 대한 시각이 바뀌어도, 소크라테스처럼 내가 모르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도와줬다 해도 너무 심하게 당기면 안 된다. 알게 모르게 살짝살짝 이뻐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