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위로

민낯 - 자작시

by 레마누


오래전


사납게 내리는 소낙비에


온몸이 쓰리게 아팠던 날


내리는 비만 쳐다보는 널 보며


알 수 있었다


네가 할 말을






말을 쏟아부었다


너는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그만하자는 말을 토해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지면 안 되는 사이였다


우리의 시간은 호락호락 넘어갈 수 없었다



밀랍인형처럼 굳어진 네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가면을 벗겨 민낯을 보고 싶었다.



너는 가고 나는 남았다


분칠하고 노래 부르던 시간은 끝나고


더듬거리며 걷는 어둠 속에 서 있다




내가 아는 모든 슬픈 단어를 통 들어도


너를 표현할 길이 없어 그저 서글프게 꺼이꺼이


우는 밤이다








글짓기 숙제를 못 하고 내일 학교를 가야 한다면 시를 썼다. 어린 생각에 산문보다는 시가 더 쓰기 쉽다고 생각했다. 머리에서 나오는 말을 노래하듯이 풀어내면 그게 시라고 생각했다




드문드문 흰머리가 보이는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쓰기 어려운 게 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쓰면 주정뱅이의 하소연으로 끝난다. 언제나 멋진 결말은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좋은 노래에는 좋은 후렴구가 있고, 멋진 말에는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로 기억될 뿐이다.



굳이 내 속을 들어내고 구불구불한 내장을 투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글을 쓰고, 내 속을 뻔히 드러낸다면 그건 내가 아주 많이 외롭거나 슬프거나 술을 마셨다는 말이다




누군가 읽어줄 글을 쓴다는 건 내일이 개학인 초등학생처럼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기어이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을 쓰고 혼자서 만족하는 길을 찾아 나선다.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아주 오랜 전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다.


사랑을 하면 슬퍼지고 나를 잃으면 희미해진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그러므로 순간에 충실할 뿐 끝을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 내가 서 있는 땅이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흔들흔들 춤을 추고 있다. 누군가 줄을 잡아당기면 나도 모르게 팔이 올라가고 다리를 움직인다.




또 한 번 생각하면 나는 너무 단단해서 도저히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누가 뭐라 해도 내 생각을 지키고 믿는 바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굳어지기 시작한 시멘트동상처럼 나는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다.




문득


거울 속의 내가 낯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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