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마누 May 24. 2023

콩트입니다

지우개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미친년. 미친년 산발이 된 머리를 하고 제 머리를 쥐어박던 은숙은 이대로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석이 떨어져 지구가 멸망하는 거야. 아니면 어느 못된 독재자의 순간적 판단미스로 핵폭탄이 떨어지든가. 어디선가 느닷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 다 같이 죽어버렸으면.. 아니지. 나 혼자 죽는 게 나을 건가? 은숙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때 그날 그 장소로 돌아간다면 나는 결코 그렇게 반갑게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텐데.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고 하지만 사실 은숙은 눈치를 채고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말이 계속 들려왔다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유혹은 꿀처럼 달콤했고 보상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확실했으니까. 어쩌면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을 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자 은숙이 오줌이 마려운 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모든 중요한 일들이 그렇듯이 처음은 아주 사소하고 작게 시작되었다. 은숙은 막내딸의 입학식에서 고등학교 동창인 미혜를 만났다. 처음에는 딸에게만 집중하느라 몰랐다.  뒤에서 어깨를 두들기며 환히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여자가 낯익었다. 주차가 서툰 은숙은 학교 주차장에 일찍 도착했다. 양쪽이 비어있는 차선에 주차하고 있는데 은숙의 차 옆으로 고급 수입차가 들어왔다. 운전석문을 열다 말았다. 능숙하게 주차하고 내리는 여자의 팔에 은숙이 핸드폰에서만 봤던 샤넬백이 들려 있었다. 뭐지?  어림잡아 작은 아파트 한채 값을 온몸에 달고 있는 여자가 고등학교 때 그 미혜였다니.


교실 안에서 미혜는 얌전하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한 채 2학기때는 거의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친구의 안부보다 모의고사점수와 당장 자신이 갈 수 있는 대학이 더 중요했다. 아무도 미혜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조차 미혜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미혜는 그렇게 숨이 턱턱 막히는 고3교실 안에서 점점 잊힌 존재가 되고 있었다. 


은숙이 미혜를 본 건 독서실에서 나온 새벽 1시쯤이었다. 처음에는 미혜인 줄 몰랐다. 짧은 미니스커트와 검은색 스타킹을 신은 맞은편 여자가 무척 추워 보인다는 생각을 했을 뿐.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고 걸어가던 은숙에게 말을 건 짧은 미니스커트의 여자. 짙은 화장과 부풀린 머리를 했지만 웃는 게 예쁜 그 여자는 선생님이 찾지 않았던 고3 미혜였다. 그리고 미혜를 본 게 얼마만인지.


여기 되게 유명한 데 아냐?

응, 연예인이 하는 식당인데 인스타 하는 사람들한테는 성지 같은 곳이지. 

너 대단하다

뭘. 이 정도에


은숙은 대단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 못마땅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진심이었다. 은숙은 미혜가 알려준 계정으로 미혜를 팔로우하고 미혜의 일상을 찾아봤다. 며칠째 은숙은 미혜의 인스타그램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미혜가 점심을 먹자고 나온 곳 역시 인스타그램 속의 그곳이었다. 미혜는 손안에 잡히는 핸드폰세상 속에서 잘 나가는 셀렙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진짜 돈이 돼?

그럼,  그게 다 돈이지


은숙이 본 건 미혜의 반지와 팔찌, 목걸이와 가방

자동차와 아파트. 그리고 미혜가 판매하는 화장품이었다


은숙은 뭐에 홀른 것처럼 미혜에게 카드번호와 신상정보를 알려줬다. 미혜의 말에는 진심이 있었고. 세 아이를 키우며 언제나 생활비가 부족한 은숙에게 미혜는 은숙을 도와주기 위해 내려온 천사였다. 은숙의 통장에 돈이 쌓이자 은숙의 남편이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은숙이 미혜와 만나고 들어온 날이면 은숙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잘 될 거라는 희망과 이래도 될까. 하는 불안감. 그게 뭔지는 몰라도 은숙은 눈 딱 감고 지금만 생각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해서 돈을 벌고 있는데 뭘. 딱히 나쁜 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약간의 과장광고는 대기업에서도 하는 거잖아. 그게 나쁜 건 아니지. 


그리고 미혜는 사라졌다. 은숙의 집에는 미혜가 만들었다는 화장품과 가방들 공구로 진행했던 신발들이 든 갈색박스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만일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가 있다면 은숙은 미혜를 만났던 그때 숨 막히던 고3교실 유리창에서 보았던 교문을 나가는 미혜의 모습을 지우고 싶었다. 혼자 가을햇살을 똑바로 맞으며 걸어갔던 그 아이가 멋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지우고 싶었다. 은숙은 그때를 누군가 알고 있는 것 같아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