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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Jun 08. 2023

제주도자리물회 찐으로 즐기기

작지만 강력한 한 방


마트에 갔는데 수산물코너에서 자리가 보였다. 어떤 날 자리는 크고 실하고 어떤 날은 잘았다. 비닐에 담아 무게로 값을 매기는 자리를 사고 와서 시어머니께 드렸더니 좋아하셨다. 자리물회가 당기면 제주에 여름이 온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작은 트럭에 철마다 다른 것들을 싣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 시내에 있는 작은 방 한 칸에서 나와 세 살 어린 동생은 매일 부모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다. 동네친구들은 다 유치원에 갔다.


여름이면 새벽에 부두에서 산 자리를 팔러 다녔다. 엄마가 일이 있을 때 아빠는 나를 조수석에 태우고 다녔다. 아빠가 트럭에서 '자리삽서'라고 말하면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아빠는 양동이에 가득 찬 자리를 바가지로 퍼서 팔았다. 사람들은 자리를 많이 샀다.







내가 9살 때 부모님은 제주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할아버지가 계신 시골에 내려가서 살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중산간이었다. 차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자리가 많이 나오는 모슬포였다. 자리삽서 소리는 시골에서도 변함없이 들렸다.




할머니는 크고 실한 자리를 샀다. 요리를 잘하는 할머니는 자리를 소금에 구워 먹거나 자리젓을 만들었다. 비늘을 벗기지 않은 자리를 불에 구우면 짭조름하고 고소했다. 지느러미를 잘 떼고 먹으면 살이 탱탱했다.





자리젓은 한번 먹고 나면 온 집안에 냄새가 오래 남아 있었다. 멀리서도 자리젓 먹는 집은 티가 났다. 이왕이면 보리밥에 자리젓을 먹는다. 자리젓갈을 먹는 것도 좋고 잘 다진 젓갈에 청양고추와 고춧가루를 넣고 참기름을 한 바퀴 뿌려 먹는 것도 맛있다. 내가 아는 진정한 밥도둑이다.





엄마는 자리물회를 잘 만들었다. 아빠가 자리를 손질하고 사선으로 써는 사이 엄마는 양념된장을 만든다.  엄마가 나를 부른다.  심술 맞은 얼굴로 왜 나만 시키냐며 볼멘소리를 해 보지만 엄마는 제피 따는 건 꼭 나한테 시켰다. 제피는 조피라고도 불렀는데 성배네 과수원 돌담에 있었다. 성배네 과수원에는 없는 게 없었다. 엄마는 소쿠리하나를 주며 등짝을 때렸다. 나는 툴툴대며 이건 도둑질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흘겨본다




과수원에 왜 개울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성배네 과수원에는 미나리가 자라고 있었다. 칼로 미나리의 밑동을 자른다. 내 키보다 큰 들깨나무에서 깻잎을 한가득 딴다. 그리고 옆에 있는 제피나무에서 제피를 땄다. 제피는 조피라고도 부르는데 잎이 작고 촘촘하며 가시가 크다. 딸 때 조심하지 않으면 가시에 찔린다. 투덜대며 따다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면 정신이 바짝 나곤 했다.




소쿠리를 엄마 앞에 턱 하니 놓으면 엄마는 빠르게 야채들을 썰어서 커다란 대야에 담는다. 그 사이 잘 썰어진 자리들이 준비되어 있다. 엄마는 양념된장과 야채와 자리를 먼저 무친다. 옆에 앉아 있다가 연한 자리를 하나 집어 먹는다. 엄마가 야채와 섞어서 다시 준다. 뭔가 하나가 빠진 맛이다.




그때 아빠가 빙초산을 가지고 온다. 엄마가 물을 부으면 아빠가 빙초산을 몇 방울 떨어뜨린다. 우리 집에는 큰 유리병에 빙초산이 있었다. 자리물회에는 이상하게 빙초산이 들어가야 맛이 난다. 맛이 완성된다.





대학교 때 선배가 자리물회 먹으러 가자고 해서 신나게 따라갔다 실망한 적이 있었다. 제주시에서 제일 유명한 식당이라는 그곳에는 제피도 빙초산도 없었다. 깨끗하고 넓은 홀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빨간 물회를 먹고 있었다. 자리물회는 된장베이스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뭐지? 싶었다.




큰 딸을 임신했을 때 제일 먹고 싶었던 것도 자리물회였다. 엄마가 만들어 준 제피와 빙초산이 들어간 자리물회 한 그릇을 먹으면 답답한 속이 시원해질 것만 같았다. 남편에게 그 말을 했더니 기겁을 했다. 원래 자리물회를 안 먹는 시에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싫어할 일인가 싶어 섭섭했다. 임신했을 때 못 먹었던 것, 섭섭했던 건 평생 간다는 것도 모르는 바보 남편이라고 속으로 욕했다.



대학교 때는 말을 못 했지만 요즘은 식당에 자리물회를 먹으러 가면 조피 있어요? 묻는다. 그러면 한번씩 보고 나서 가져다준다. 식탁 위에 제피가 놓여 있는 걸 보면 식당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또 하나 달라진 것은 식탁 위에 빙초산과 사과식초가 같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자리물회를 먹을 때 어떤 식초를 넣는가에 따라 제주도민인지 관광객인지를 알 수 있다.







강한 향을 지닌 제피를 넣음으로써 자칫 밋밋할 수 있는 된장베이스의 맛을 풍성하게 해 주고, 억센 자리에 빙초산을 넣어서 약간 부드럽게 만들어야 진짜 자리물회라고 할 수 있다. 쌀국수를 처음 먹을 때 강한 고수의 향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고수추가를 외치는 것처럼 자리물회에도 제피와 빙초산이 들어가야 진정한 제주의 자리물회를 즐겼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아무리 말해도 남편은 한치물회만 먹는다. 그래도 좋다. 나는 자리물회를 당신은 한치물회를 먹으면 되니까. 사과식초를 넣어도 되고 제피를 안 넣어도 된다. 한번 먹어보고 나서 입맛에 안 맞으면 할 수 없는 거다. 하지만 도전은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해 준 자리물회를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지금은 더 그리운 제주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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