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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May 11. 2023

열무김치가 두 통 생겼습니다

하고 싶어 하는 것과 시켜서 하는 일의 차이

실컷 놀다 공부 좀 해 볼까? 하는 순간 엄마가 문을 열고 소리친다. 넌 공부 안 하니? 그때의 반발심을 기억하고 있다. 하려고 했지만 하지 않았던 열다섯의 내가 아직 살아 있다. 내 안에




마트에 갔는데 싱싱한 열무가 있었다. 이걸 사고 가? 말아? 한참을 고민하다 열무김치를 좋아하는 아들생각에 두 단을 사 왔다. 집을 대충 치우고 열무김치를 만들었다. 사과와 배와 양파를 갈아 넣었다. 만들 때마다 맛이 다른 건 네이버선생님이 바뀌기 때문이다.



19년 차 전업주부지만 아직도 김치를 할 때는 네이버를 검색한다. 언제나 그렇듯 할 때는 힘들지만 하고 나면 뿌듯한 집안일. 김치통하나를 가득 채운 열무김치에 혼자 뿌듯해하고 있었다



어디니?

아이들 데리러 왔는데요.


언제쯤이면 환하게 웃으며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을 수 있을까?


열무 해 줄 테니까 김치 해 먹으라

네?

어, 어머니는 왜 안 하시고?

열무가 연할 때 빨리 해 먹으라이.



갑작스러운 연락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생긴 열무다.  어머님은 얼마 안 된다고 하지만 알고 있다. 어머니와 나의 조금은 다르다는 걸.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가 보니 성질 급한 어머님은 텃밭에 있는 열무를 씻고 소금에 절인 후에 찹쌀풀을 쑤고 계셨다. 본인이 만든 김치를 어느 순간부터 아들이 먹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던 어머니는 사랑하는 막내아들이 먹을 열무를 심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는 듯했다.



아무 소리 없이 절여진 열무를 가지고 왔다. 어머님은 우리 앞집에 살고 있다. 저녁을 해야 하는데 김치가 먼저여서 양해를 구하고 열무김치를 했다. 열무김치가 두 통 생겼다





김치를 하는 건 별로 손이 가지 않는다. 양념재료도 다 있다.  양념을 만들어서 버무리기만 하면 된다. 우리 가족은 모두 열무김치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한 있었다.


정체가 뭘까.



마트에서 내가 산 열무는 자발적인 소비였고 행동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음이 내켜서 선택한 것이다. 그런 일을 할 때는 힘이 들어도 마음은 가볍다. 찹쌀풀을 쑤고 과일을 갈아내면서도 맛있게 하고 싶다는 욕심에 이것저것을 더하게 된다



어머니가 해 주신 열무는 어머니가 소일거리를 위해 씨를 뿌려서 거둔 것이다. 그걸 캐고 씻고 절이는 수고를 해 주셨지만 하나도 반갑지 않은 건 내가 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 팔순의 시어머니는 막내며느리인 내게 한탄 다.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 맞춰 살았지만 정작 자식들은 그 공을 몰라줘서 섭섭하다고 하신다. 어머님이 하신 말씀과 행동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근원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했다.



선물은 상대가 받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다. 내가 갖고 싶은 좋은 것을 준다. 내가 아는 선물의 개념이다. 시어머니는 당신이 주는 행위에 만족한다. 본인이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다. 받는 사람의 입장이나 생각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렇게 많이 주는데 별반응이 없다고 섭섭하는데 내가 보기엔 당연한 일이다.



열무만 해도 그렇다. 내가 원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앞집에 사는 막내며느리에게 연한 열무김치를 해 주고 싶었다면 미리 언질을 주셔야 했다. 어머님은 자신이 먹고 싶어서 열무를 심었지만 양이 많자 갑자기 앞집에 던져줘야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졸지에 열무김치 두 통이 생겼다. 마트에서 산 열무는 연하고 부드러워서 고춧가루를 조금 했다. 물김치처럼 해서 많이 먹기 좋다. 어머님이 주신 열무는 텃밭에서 막 키운 것이다. 양념을 세게 했다. 익혀놓고 여름 내내 먹어야겠다.




결혼생활 19년에 세 아이를 낳고 살다 보니 이제는 어느 선에서 멈춰야 할지를 알게 됐다. 어머님도 조금은 알고 있는 것도 같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하고 싶은 말의 10분의 1만 하며 나름대로 평화롭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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