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나면 정말 좋기만 할까? 그 모든 것들이
초등학교6학년 때 아빠는 우리 집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수박농사를 지었다. 작은 산등성이에 있는 밭이었는데 주변에 공동묘지가 있어서 낮에도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트럭이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갔다. 수박밭에는 작은 나무정자가 있었다. 그곳에서 하루 종일 누워 수박을 먹으며 밭을 지켰다. 수박값이 좋았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수박도둑들이 많았다.
여름 날씨는 변덕스럽다. 6학년인 나와 3학년인 동생을 데리고 수박밭에 도착한 아빠는 우리 둘만 내려두고 낚시를 갔다.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가만히 누워 있으면 새소리, 개구리소리, 풀잎 스치는 소리, 온갖 소리가 들리는 깊은 산속에서 우리가 뭘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은 친절하지 않고 언제나 편파적이다.
태양도 제 풀에 지쳐 늘어지는 한여름이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한번 지나갔다. 갑자기 하늘이 갈라질 듯 번쩍하고 번개가 때리더니 곧이어 주변을 흔드는 천둥소리.
바로 전까지 쨍쨍하던 해는 어느새 검은 구름 사이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앞이 안 보이게 쏟아지는 비.
천둥과 번개와 비. 두려웠다. 너무 무서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나무정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몇 시간이 흐른 지도 모른 채 하늘이 난리를 피우는 걸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가자.
안돼. 아빠가 기다리라고 했단 말이야
여기 있다가는 죽을 거 같아. 걸어서 집에 가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른다. 그냥 여기가 아니면 될 것 같았다. 공포는 터무니없는 상상력으로 제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온갖 상상을 하다 보니 머릿속이 꽉 차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걸어가면 돼. 내가 길을 알고 있으니까. 가자.
안 가겠다고 버티는 동생을 억지로 끌고 정자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비는 앞이 보이지 않게 쏟아지고 있었다. 몸에 닿는 비가 손바닥으로 세게 치는 것처럼 따갑게 아팠다.
다행히 천둥, 번개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았다, 나는 동생과 손을 꼭 잡고 걷기 시작했다.
차로 20분 걸리는 거리면 어린아이들 걸음으로 두 시간정도였을까? 아니면 세 시간?
모르겠다. 우리가 얼마나 걸었는지. 걸으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과 집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으로 한걸음도 쉬지 않고 걸었다.
걷다 보니 산을 내려왔고 걷다 보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비를 쫄딱 맞으며 걷는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집에 들어와 쉬었다 가라고도 했지만 우리 둘은 손을 꼭 잡고 집을 향해 그저 묵묵히 걸었다.
걷다 보니 그렇게 세찼던 비가 조금은 잦아들고 거리는 어느새 말갛게 변하고 있었다. 익숙한 길에 들어서자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무서워서 불렀는지 신나서 불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둘이 서로 목청껏 불렀던 기억이 난다. 두려움과 긴장감이 풀리면서 우리가 해냈다는 자신감과 집이 가까워진다는 안도감. 여러 가지 감정들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내려갔다. 집에서는 지독히도 말을 듣지 않던 동생이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우리 동네 사거리에서 아빠를 만났다. 아빠는 날씨가 나빠져서 낚시를 접고 우리에게 가려고 했다며 왜 기다리지 않았냐고 했다. 우리는 대꾸할 힘도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엄마와 아빠가 싸웠다. 평생 아빠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했던 엄마가 아이들만 놔두고 낚시를 가면 어떡하냐며 소리를 질렀다,
동생과 나는 엄마, 아빠가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커다란 요를 깔고 누워 가만히 있었다. 추운데 따뜻했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지금도 동생과 여름이 되면 그때의 일을 이야기한다. 쏟아지는 비. 무섭게 내리치는 번개와 세상을 흔드는 천둥소리. 그리고 작고 하얀 길을 걷는 어린 여자 아이 둘.
손을 꼭 잡고 서로에게 의지한 채 계속 걸었던 기억. 온몸은 홀딱 젖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목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고 낄낄댔던 그때. 그 시절 여름의 기억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그날의 기억으로 인해 나는 조금 터프해졌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좋은 건지 나쁜 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 봐야 아는 것들. 경험으로 느끼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아닐까
저 너머에 근사한 뭔가가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볼래요 -빨간 머리 앤-
정말 하기 싫은 말인데 꼭 써야 할 때가 있다. 나도 예전에는 눈 반짝이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었는데. 나도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딱히 뭘 하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입버름처럼 자기 위안으로 삼는 말.
나도 예전에는.
그 여름날 용기를 내어 나무정자를 나왔던 열세 살의 나를 떠올리며. 그때의 기억이 나에게 어떤 힘이 되어 주기를..
생각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생각지도 않은 일을 만나는 상상을 해 본다. 그때는 빨간 머리 앤처럼 눈 똥그랗게 뜨고 깜짝 놀라는 척해야지. 다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현명하게 넘어가고 싶다. 마음속에 13살 아이를 꼭꼭 숨겨둔 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잘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