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꿈같은 하루

by 레마누

수요일 밤이었다. 어두운 조명이 여자의 주름을 가려주고 있었다. 여자는 가볍게 잔을 들었다. 아무 말없이. 누군가 여자가 마셨던 컵을 치웠다. 여자는 블랙러시안을 세 잔 째 주문했다.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20세기 소년. 가게이름처럼 오래된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LP에서 나오는 음악은 여자의 가슴에 스며들었고, 여자는 기분이 좋았다 우울해졌다 기뻤다 슬퍼졌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여자는 앉아 있었다



가끔 생각난 듯이 주위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여자의 핸드폰이 테이블 위에 있었지만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여자를 지켜볼 뿐이다. 여자는 처음에는 신이 난 듯했다. 가게문을 열고 들어서며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오랜만의 외출이 즐거운 듯 상기된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찍으며 낄낄대던 여자는 한 잔의 술을 마시자 금세 진지해진 얼굴로 종이에 신청곡을 적어내려 갔다



기다릴 날도 지워질 날도,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내가 아는 한 가지.



여자가 좋아했던 노래가 안주가 된다. 여자는 가만히 눈을 감기도 하고 가끔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도 하며 음악을 듣는다. 음악이 여자를 감싸 안는다. 여자가 흥에 겨워 일어난다. 가볍게 몸을 흔들다 눈이 마주친 또 다른 여자에게 다가간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눈이 갔던 그 여자에게.



여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캄캄한 자취방에 들어가는 게 무서웠던 여자는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여자에게 담배는 외로움을 몰아낼 도구이자 고독을 함께한 친구였다. 결혼을 하고 여자는 담배를 끊었다.



또 다른 여자는 여자와 나이가 같았다. 오랜 외국생활을 접고 정착을 했다고 한다. 영어를 가르치며 살고 있는데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는 그 여자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자신을 지켜가고 있었다



두 여자는 곧 자리를 함께 했다. 그 여자가 내미는 담배를 받아 쥔 여자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듯 천천히 담배를 피웠다.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기침이 났다. 웃음이 나왔다. 여자가 웃자 그 여자도 함께 웃었다.



여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그 여자는 여자의 남편과 세 아이얘기를 들으며 잠시나마 자신이 꿈꾸는 세상이 어쩌면 작은 가정은 아닐까 생각했다.



오래전 프로스트가 쓴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났다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니 두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참을 서서

낮은 수풀로 꺾여 내려가는 한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 생각했지요

풀이 무성하고 발길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그 길도 걷다 보면 지나간 자취가

두 길을 거의 같도록 하겠지만요



그날 아침 두 길은 똑같이 놓여 있었고

낙엽 위로는 아무런 발자국도 없었습니다

아, 나는 한쪽 길은 훗날을 위해 남겨 놓았습니다

길이란 이어져 있어 계속 가야만 한다는 걸 알기에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여기면서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책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여자는 아쉬워하며 술집을 나왔다. 그 여자의 배웅을 받으며, 언젠가 우연히 만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날 하루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람이 되어 속마음을 털어놓았지만 그걸로 끝이라는 걸. 어쩌면 여자의 가 보지 못한 길이 그 여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두 갈래 길에서 어디로 갈까 고민했던 이십 대를 생각했다. 그때는 분명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빨리 잊혔다는 사실에 당황하며 여자는 그런 일들이 정말 일어났던 일일까?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일까? 사실이길 바라는 내 마음일까?

모든 것이 꿈만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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