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얘기도 누가 듣고 있을까?
오래전 일이다. 나는 무척 가난한 대학생이었다. 항상 돈이 없었다. 부모님은 대학입학금만 내줄 테니 그다음부터는 알아서 하라고 하셨고 본인들의 말을 철저하게 지키셨다. 나는 용돈이라는 것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자취방도 혼자 구해야 했다. 20살이었는데 오일장신문을 들고 공중전화에서 빨간 볼펜으로 줄을 그어가며 방 나갔어요? 묻곤 했다. 겨울은 너무 추웠고 여름은 항상 더웠다.
자취방은 싸고 버스정류장에서 가까워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아주 오래된 집에 들어가 살았다. 주인집과 마루를 같이 하는 바깥방에 푸세식 화장실. 독채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집 안 구석에 있는 방 하나를 얻어 살았다.
돈이 하나도 없어서 3일을 굶은 적이 있었다. 방 하나 달랑 있는 자취집이었는데 주인이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나는 싱크대를 뒤져 아주 오래된 시리얼을 씹어 먹었다. 다 먹으면 주인이 알아차릴 까 조금만 먹었는데 그 맛이 입에 계속 남았다. 나중에는 라면도 하나 훔쳐 먹었다. 삐삐가 울렸는데 공중전화를 할 잔돈이 없어서 집에만 있었더니 친구가 떡볶이와 순대를 사 들고 왔다. 하마터면 그 친구를 사랑할 뻔했다.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를 해야 학점을 따고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데 새벽 2시까지 일하고 나서 집에 들어가면 책이 눈에 안 들어왔다. 아침강의는 거의 빼먹었다. 시험은 잘 봤지만 출석이 모자랐다. 나는 매우 불성실한 학생이었고 항상 돈이 없었으며 그럼에도 돈을 모아 자취방을 구했고 등록금을 꼬박꼬박 냈다.
무섭고 힘든 일이 일어났다. 가까스로 버티며 살았었는데 그날 이후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목욕탕에 가야지. 죽더라도 깨끗하게 씻고 죽고 싶었다. 주섬주섬 목욕바구니를 들고 동네 목욕탕에 갔다.
따뜻한 물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늙은이처럼 기운 빠지게 앉아만 있었다. 누가 툭 치며 나갔다. 마치 너도 같이 나가자는 듯이
정신을 차리려고 찬물을 끼얹었다. 사람들이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사우나실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홀린 듯이 따라 들어갔다. 옷을 다 벗은 여자들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수건을 머리에 쓴 사람들, 가끔 찬물로 세수를 하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앉아 있었다. 온몸에 땀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머리가 멍해지면서 문득 밥을 먹은 게 언제였더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변비약을 사러 약국에 갔다. 동네약국이라 자주 들리는 곳이었다. 언제나 먹던 약을 달라고 했는데 나이 지긋한 약사님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얘기했다.
약을 먹지 말고 밥을 먹어요. 아가씨.
툭. 누군가 팔꿈치를 쳤다. 이 목욕탕에서는 사람들을 이렇게 막 툭툭 치나 보다. 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여자가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플라스틱통을 건넸다. 뭔지 몰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먹어인지. 먹어요인지 반말인지 아닌지 말끝이 흐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땀 빼면 쓰러져.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넋이 나가있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나도 있다는 듯이 통을 들어 보이는 여자는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먹는 식혜가 제일 맛있더라. 여자는 속이 다 뚫겠다는 생각인지 한숨에 식혜를 꿀꺽꿀꺽 마셨다. 하도 시원하게 마셔서 나도 따라 했다. 오랜만에 달고 시원한 게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죽어야 하는데 살 것 같다니.
오늘 오랫동안 내 속을 들끓게 했던 드라마 <도깨비>가 끝이 났다. 매일 아끼며 딱 한 편씩만 봤다.(7년 전 끝난 드라마를 이제야 보고 혼자 난리 피우는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다)
마지막에 김신이 넋이 빠져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 샌드위치를 건네며 힘내라고 말한 중년남자. 그리고 김신이 말한다. 당신이 세상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누군가 당신을 세상 안으로 넣는다면 그때 신이 있는 것이라고. 신은 어느 한순간 당신의 곁에 잠시 머무른다고.
그 장면을 보면서 오래전 일이 생각났다. 그 여자도 신이었을까? 20살의 여자아이를 죽겠다고 마음먹고 살을 벗겨내듯 목욕탕에 앉아 있던 그 여자를 살리려고 했던 신이었을까? 나는 또 얼마나 자주 신을 만나 또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을까?
삶은 계속된다. 차은탁이 죽고 저승사자의 벌이 끝나고 김선은 제 생애를 열심히 살다 제 명에 죽었다. 모든 것이 흘러가는 듯 보이는데 쓸쓸하고 찬란한 신 도깨비는 그저 혼자 살아간다. 떠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돌아올 사람들을 기다리며 그렇게 삶이 계속된다.
또 하나의 인생 드라마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