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기

by 레마누

2박 3일 동안 경주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아이들을 씻기고 짐들을 정리하는데 더웠다. 너무 더웠다. 여행 가기 전에 청소했던 제습기를 돌리고 선풍기를 꺼냈다. 먼지가 쌓여 있었다. 에어컨은 아직 청소를 못 했다. 여름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급한 대로 소독용 물티슈로 먼지를 닦고 선풍기를 틀었다. 여행 갔다 온 사이 여름이 찾아왔다. 그 말은 곧 습기와 더위가 몰려온다는 뜻이다. 준비를 해야 한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선풍기를 꺼냈다. 깨끗하게 사용하려면 분리를 해서 퐁퐁으로 닦는 게 좋다. 물을 뿌렸더니 먼지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끈적한 날개를 세제 묻힌 수세미로 닦았다. 선풍기의 앞과 뒤는 물로 한 번씩 씻고 닦았다.




예전에는 십자드라이버와 일자 드라이버도 구분 못했었는데 혼자 척척 볼트를 조립하다니. 스스로 대견해하며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였네. 혼잣말하며 열심히 선풍기를 닦고 있었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목욕탕삼촌의 다급한 소리다. 이상한 냄새도 났다. 우리 집은 주택가인데 작은 텃밭에서 사람들이 가끔 쓰레기를 태운다. 오늘은 냄새가 유독 심하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 삼촌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119라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우리 집 앞에 있는 이층 집이 불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집의 1층 거실에서 불이 나서 마당으로 번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마당은 넓고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오래된 나무들이 무성했다. 나무 타는 소리와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드릴 때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붉은 불길이 거세게 일었다. 검은 연기가 동네를 뒤덮고 코를 찌르는 냄새와 개. 그래, 그 집에는 개 두 마리가 있는데... 다급하게 골목으로 나온 사람들. 소방차를 기다리는 5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불길은 금세 잡혔다. 이슬비가 내리는 습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집에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무섭게 번지는 불길과 펑펑 터지는 소리가 주는 공포에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바로 전까지 덥다며 투덜거리며 선풍기를 닦고 있었는데 밖에서는 불이 났다. 습도가 높아서 짜증이 났는데 만일 건조한 날씨였다면 많은 나무들이 있는 그 집에서 얼마나 불이 빨리 번져나갈지 상상만 해도 무섭다




밖에 한참을 서 있다 집에 들어오니 다리에 힘이 빠졌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국수그릇에 밥을 푸고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올렸다. 들기름을 한 바퀴 넉넉하게 둘렀다. 계란프라이를 두 개 반숙으로 해서 올렸다. 혼자 중얼거리며 박박 비벼 먹었다. 살 것 같았다.




살아 있다는 건 뭔가를 느끼는 것이다. 아픈 것. 배 고픈 것. 추운 것을 느낄 때 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안타까움,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통해 마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소방관이 털이 반쯤 탄 개를 안고 나올 때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납기로 유명한 개들이었다. 동네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시끄럽게 짖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개들이었다. 그런데 불을 끄는 것을 보던 사람들은 입을 모아 개가 한 마리 더 있다는 것을 소방관에게 알렸다. 구조되어 나온 개는 평소의 사나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겁을 먹은 모습이 안쓰러웠다.




개들은 자신들의 공간에서 의기양양했다.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짖으며 위협했다. 사람들은 개들의 소리에 놀라기도 하고 겁을 먹기도 했다. 화재로 인해 상황이 바뀌자 개를 미워했던 사람들이 이제 개들을 걱정하는 입장이 되었다. 습도가 높아서 제습기와 선풍기를 닦으며 이런 날씨 정말 싫다고 징징댔는데 그 날씨 덕분에 불길이 많이 번지지 못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이 부정적이 된다. 반면 매사에 다행이다. 감사하다를 입에 달고 살면 작고 소소한 것 속에서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오늘 비가 와서 다행이다. 불이 옆집으로 번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개가 살아남아줘서 감사하다.



글을 쓸 수 있어 너무 좋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