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한 사람들

by 레마누

사랑하는 아이야.

오늘은 엄마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해. 나이도 사는 곳도 다르지만, 매일 새벽에 만나고, 또 틈날 때마다 줌에서 만나니 때론 친구 같고, 또 때론 가족 같은 사람들 말이야. 그래, 네가 알고 있는 <엄마의 유산> 속의 작가님들이야.


KakaoTalk_20251229_132149415.jpg 엄마들이 자녀에게 쓴 편지-엄마의 유산


어제 낭독극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데, 발걸음이 너무 무겁더라. 7시 공연이 남았는데, 엄마는 6시 40분에 나왔거든. 9시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어. 처음과 끝을 함께 하지 못하니 미안하기도 했지. 이럴 때는 제주에 사는 게 처음으로 불편하다는 생각을 했어.


생각해 보면 엄마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늘 그랬던 것 같아.

막차 때문에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하는 거 말이야.

늘 끝날 시간을 체크하면서 어울려야 했지.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지만,

시간을 정해놓고 산다는 것은 아쉬움과 미련을 동반했지.

시계를 보는 게 습관이었어.

물론 막차를 놓칠 때도 많았지.

택시를 합승하기도 했어.

하지만 그건 별로 좋은 경험이 아니었어.

친구집에서 잔다거나 밤을 새운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어.

친구들은 신데렐라냐고 놀렸지.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엄마를 잘 안 부르더라. 시작과 끝을 함께해야 하는데, 늘 중간에 빠져나가니 그럴 만도 했겠지. 그래서일까? 엄마는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는 일은 시작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어.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발을 내디뎠지. 그렇게 골라서 걷다 보니 발걸음은 늘 조심스러웠고, 사람들과 만나는 것 역시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게 습관이 되었어.

깊이 빠져들지도 못했어.

끝까지 가지 못할 것을 미리 염려했거든.


너는 아무에게나 말을 잘 시키는 엄마가 신기하고 부럽다고 했지만, 엄마는 빨리 친해지는 대신 깊이를 포기하며 살았어. 발을 집어넣으면 빼지 못할까 봐 매번 안전한 곳으로만 다니려고 했지. 그래서 엄마의 일상은 늘 고만고만하게 이어졌어. 큰 문제없이, 큰 고민 없이, 깊은 관계없이.


어쩌면 엄마는 겁이 났었는지도 몰라.


속을 내보이면 속을 파헤치고, 말을 하면 그 말이 가시로 돌아와 박혔지. 그런 관계가 반복되다 보니 엄마는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을 찾게 됐어. 사람 속에서도 늘 외로웠고,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괜찮은 척 웃는데 그 웃음이 썩 자연스럽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아이야,

엄마가 무해한 사람들을 만났어. 편안함을 넘어서 안전하고 무해하다는 느낌을 받은 거야. 바로 어제. 낭독극을 하는 동숭무대소극장에서. 신기한 경험이었어. 작은 대기실 안에는 낭독극을 준비하는 작가님들이 있었는데, 작은 소란스러움조차 너무 편안했어. 다들 처음 해보는 낭독극인데,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긴장을 하지도 않았어. 일사천리라는 말 있지. 마치 하나의 물줄기가 터지자 천리를 가는 것처럼 일이 척척 진행되었어. 여러 명의 몸인데 마음이 하나인 것 같았지.


KakaoTalk_20260118_211308096.jpg 리허설


그곳에는 어떠한 부정적 감정도 없었어.

그저 잘 해내기를 바라는 마음과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과

감사히 그것을 받는 사람들만이 있었지.

누구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르지 않았어.

망설이지도 않았어.

매일 줌으로 만나서 그랬을까?

우리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어.

등을 쓰다듬고, 차가운 손을 덥혔지.

울먹이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함께 울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웃기도 했어.

사람의 눈을 그렇게 오래 쳐다본 것도 처음이었단다.

그건 정말이지 아름다운 광경이었어.


아이야.

어제 엄마가 있던 곳은 정말 안전한 곳이었고, 엄마가 만난 사람들은 무해한 사람들이었단다. 혼자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어울려 있으면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 사람들이었어. 서로의 키를 재지 않았고, 아무도 비교하지 않았어. 각자의 모습 그대로 어우러졌지. 그것은 진정한 조화였단다. 그 속에서 빠져나오기가 싫었어. 그 조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거든. 하지만 그 또한 작가님들은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인사를 나누었지. 그들은 제주에 사는 엄마를 그래서 늦게 오고 빨리 가는 엄마를 그냥 받아들인 거야. 변명을 할 필요가 없었지.


그건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어. 이유를 설명하고, 그럴듯한 말을 생각해야 해서 머리가 아팠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 오롯이 순간과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지. 쓸데없는 감정에 시간을 뺏기지 않았어. 본질에 충실했지.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어 각자의 모습으로 서 있었던 거야. 그걸 너에게 말해주고 싶었어.


너는 말이 없지. 누군가 말을 걸기 전에는 말을 하지 않잖아. 엄마는 늘 그게 걱정이었어. 화려한 말로 자신을 꾸미는데 능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 속에서 혼자 묵묵히 살아가려면 힘들거라 생각했어. 엄마가 착각했어. 너는 말만 하는 관계가 아니라 깊이 있게 나누는 관계를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엄마 역시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단지 눈에 보이는 친구들의 숫자에 연연했어.


<엄마의 유산>에서 만난 작가님들과 말을 나누며 알았어. 경험을 함께 나누고, 결과를 누리는 관계가 무해하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내가 할 일을 해내는 것으로 관계가 유지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엄마는 이제야 알았단다.


아이야.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참 많더라. 그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너의 눈과 마음이야. 엄마는 네가 좋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너만의 모습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어. 꾸미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공간에서 타고난 본성대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거야. 자연스럽게 조화롭게. 그 안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거지. 엄마 역시 작가님들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니 하루도 소홀히 살고 싶지 않구나.


이건 경쟁도 질투도 아니야.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거야. 어제의 낭독극이 엄마에게 남긴 건 바로 "편안한 공간에서 무해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나를 발견하다"였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퉁퉁 부은 다리가 저려왔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더라.


하루를 돌아보며 엷은 미소를 지을 수 있어 참 좋았어.

할 일을 다하고 집으로 돌아와 발을 뻗고 누우니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

엄마는 너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고되고 힘든 날에도 무해한 사람들 안에서 힘을 얻고,

네 모습 그대로 살다 집에 와서 푹 쉬는 거지.

어때, 생각만 해도 꽤 괜찮은 삶 같지 않니?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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