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시간만큼의 안녕
C시에 도착한 날이 생각난다. 파업 때문에 프랑스의 공유차량 서비스, 블라블라 카(blablacar)를 타게 되어 조금 흥분했다. 그 흥분은 숙소에 도착하자 금세 진정이 되었다. 새파란 벽, 코르크 판때기 같은 바닥, 투박한 목재 가구들. 영화 [수면의 과학] 주인공의 뇌 속 장면들이 떠올랐다. 휑한 공간에 던져진 가구들이 나를 어색하게 바라보며, ‘이제 어쩔 거야?’라고 묻는 듯했다.
호주에서 살았던, 사람 맥 빠지게 만드는, 더럽고 음침한 방들에 비해 이곳은 매우 양호했다. 아니 오히려 괜찮은 축에 속했지만 나는 기분이 영 별로였다. 빨리 내 짐과 내 먼지로 방을 채워 그 어색함을 가려버리고 싶었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머리카락들과 정체불명의 가루가 찝찝했지만 해충박멸 스프레이를 뿌리며 애써 좋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새파란 벽은 제법 매력적이었다만, 후에 그 방을 떠날 때까지도 나는 그곳을 집으로 만들지 못했다.
나는 기복이 심하다. 여러 종류의 기복들 중 감정의 기복이 가장 성가신데, 더는 통제하기가 힘들겠구나 싶어지면 한국에서 가져온 약을 먹었다. 요란한 마음은 시간을 보내면 잠잠해졌지만 공허는 성에처럼 입안에 달라붙어있었고, 그 감각은 언제나 너무 낯설고 서늘해 긴장이 되었다. 이곳에 적응하는 데에는 2주 정도가 걸렸는데, 그동안 나는 모든 곳에서 공허를 만났다. 그래서 매일 아침 먼 길로 학원을 돌아가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통화를 하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꽤 재미있다. 내가 졸린 눈을 비비며 잠자리에 들 때, 그들은 몸을 구석구석 닦으며 하루의 스위치를 켰다. 그들이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일상의 한가운데를 통과할 때 나는 아침의 서늘한 손바닥을 건너가고 있었다.
한동안 수업시간만 되면 긴장을 했다. 선생님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팽팽하게 부푼 긴장에 떠밀려서 몸에서 숨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면 축 쳐진 마음으로 한국에 전화를 한다. 때로는 답이 없기도 했다. 그렇게 거의 매일 한국으로 연락을 했고 이주 남짓이 지나자 나눌 새로운 소식은 동이 나서 그저 그런 일상을 묻게 됐다.
가끔 연락하는 친구들과는 먼지처럼 작은 소식과 마음들까지 털어낸다. 가족들과는 일상만을 묻지만 매일 꼬박꼬박 목소리를 듣는다. 가끔 나는 욕심쟁이처럼 가족들에게 대화의 질과 빈도수 모두를 바라기도 하지만 우리 집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퍽 힘든 일인 걸 안다.
우리는 '밥 잘 먹었어?',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잘 자', '잘 잤니?' 같은 정말 일상적이고 평범한 안부를 묻는다. 함께 있을 때는 궁금해하지도, 그래서 묻지도 않았던 것들이다. 우리는 그렇게 여덟 시간만큼의 안녕을 서로에게 기원한다. 여덟 시간만큼의 간격, 그동안 당신이 안녕하기를. 그들은 내가 맞게 될 오늘의 안녕을, 나는 그들이 이미 통과한 오늘이 안녕했기를 마음 깊숙하게 바란다.
우리의 바람은 같은 시공간에 있을 때보다 간절해진다. 여덟 시간, 수천 킬로미터의 차이로 나와 네가 결코 닿을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 그게 오히려 우릴 가깝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이 시차는 내게 유학생활 속 마법이고 선물이다. 생각해보면 고작 하루의 반도 안 되는 시간일 뿐인데, 그렇게 떨어져 있는 누군가가 내게 보내는 안부가 너무나도 큰 위로가 되어서 나는 굳이 더 외로워지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