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펙트 데이즈 단상
퍼펙트 데이즈를 본 건 몇 주 전인데 아직까지도 여운이 남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이야기한 것 중 하나는 '화장실 청소부'답지 않게 고상한(?) 히라야마의 취미와 그것을 일상의 루틴으로 지켜가는 그의 수도승 같은 태도이다. 그는 매일 문고판 소설을 읽으며 잠이 들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오래된 올드팝을 듣고, 오래된 필름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다. 모두 아날로그적인 것들이고, 지금은 레트로한 취향으로 비싸게 소비되는 활동들이다.
우연히 보게 된 X의 어느 포스팅에서 누군가는 히라야마가 화장실 청소부 답지 않은 먹물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음에 불편했다는 글을 보기도 했다.
히라야마는 철저하게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을 고수하며 살아간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그가 과거에 꽤 부유한 집에서 좀 더 그럴듯한(?) 직업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라는 여러 가지 힌트들을 날리는데, 그래서 자연스럽게 히라야마는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을까라는 호기심이 생기기도 한다.
히라야마는 어떤 일을 겪었고 왜 화장실 청소부라는 직업을 선택한 걸까? 그리고 우리는 화장실 청소부에 대해 어떠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길래 그의 취향과 직업이 어울리지 않다고 쉽사리 판단 내리게 된 걸까?
언젠가부터 진실로 정직하게 돈을 벌고 싶다면 회사를 다니거나 사업을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이 생각을 하게 된 건 나의 첫 직장인 석유화학 회사를 다니면서였는데, 당시 동일본 대지진이 나며 우리 회사가 판매하는 제품의 쇼티지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돼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 나 역시 대참사가 난 것이 가슴 아프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가 파는 제품 수급이 타이트 해져서 가격이 오르고 실적이 좋아지겠지라는 생각을 자동적으로 하고 있었다. 어떤 큰 재난 앞에서 회사의 이익을 생각하게 되고, 그 이익으로 인해 나에게 떨어질 콩고물을 생각하게 된다는 게 자괴감이 들었다.
사회에 좋은 기여를 할 수 있는 회사에 가면 이런 자괴감이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다음부터는 일을 선택할 때 회사가 하는 업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지를 가장 먼저 고려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십 년이 넘게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진실은, 자본주의라는 사회 시스템 내에서 회사에 소속되어서 일을 하는 한 어쩔 수 없이 적당히 거짓말을 하고, 적당히 불안을 조장하고 누군가를 착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걸 안 하면 자신이 힘들어져서 번아웃에 빠지거나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이 시스템의 치트키다.) 이 제품을 지금 사면 더 좋을 일이 있을 거라고,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환상적인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고, 이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으면 트렌드에 뒤처지는 거라고 이야기하며 나는 점점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꼈다. 물론 완전한 거짓말을 아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 진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 사실이니까.
책 <가짜 노동>에도 언급되었던 것 같은데, 결국 조직이 커지고 관리직의 규모가 커지다 보면 필연적으로 자기 자리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장하고 부풀리고 없는 문제를 만들고 있는 문제를 과장해야 하는 일이 일어난다. 특히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팔아야 하는 서비스 업에서는 더욱더 이 문제가 도드라진다.
과거 외국계 회사 지사장을 할 때도 이런 자괴감을 정말 많이 느꼈다. 내 진심을 끊임없이 속이고 회사의 입장을 대변해서 이야기하는 것의 신물남. 심지어 나의 경우 회사의 미션에 정말 공감해서 일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규모를 키우며 결국 미션보다는 돈을 선택해야 함을, 그리고 경영진의 능력은 직원들이 자기가 뭔가 엄청나게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어서 좀 더 스스로를 착취할 때 빛난다는 것을 배웠다. (물론 이것보다 더 많은 좋은 것들도 배우긴 했고, 여전히 나는 이 회사가 참 대단한 회사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회사가 아니라 완벽한 유토피아를 꿈꿨던 나에게 있었다.)
그러니까 조직에 속해있는 한, 그리고 그 조직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한,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Dignity를 지키기 쉽지 않다. 물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돈이라면 (돈을 가치로 여길 수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상관없겠지만, 나 같이 참 불편하고 예민하게 스스로에게 진실한 것이 삶에서 꽤나 중요한 가치라면 그게 어떤 조직이든 어떤 지점에서는 모순을 느낄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유일하게 그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직업이 우리가 3D 업종이라 무시했던 직업들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청소나 이사 노다가 같은 것들. 물론 이런 것들도 더 효율성이라는 미명하에 겉으로 보이게 깨끗하게 하고, 대충대충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직업들에 비해서 개인이 Dignity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다른 그 어떤 직업들보다 훨씬 더 진실되게 일할 수 있는 직업이 바로 그런 직업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경험한 세상의 렌즈로 모든 것을 해석한다. 그래서 나는 히라야마가 자신이나 타인을 속이지 않고 진실되게 돈을 버는 방법을 찾은 것이 아닐지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과거에 그는 회사의 중책에 앉아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거짓을 말하거나, 행해야 했던 상황에 환멸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가장 정직해질 수 있는 직업을 찾았고 그것이 화장실 청소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했다.
나 역시 수년째 그런 것들을 찾고 있다. 스스로에게 자괴감과 환멸감을 느끼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내가 지금까지 찾은 방법은 글쓰기와 서로가 배운 것들을 나누는 작은 모임이나 공부방 정도이다. 감사하게도 매주 글을 쓰고 있고, 새로 이사 온 집에서 사람들과 소규모로 책을 읽고 나누는 모임도 만들어 볼 생각이다.
요즘은 농사와 요리에도 관심이 생겼는데, 실제로 농사지으시는 농부님들을 보면 나는 저 정도로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금 우리 텃밭 상황만 해도... ㅋㅋㅋ) 근데 또 뭐 사람 인생 모르는 거니까 언젠가는 농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만 종종 해본다.
물론 이건 지극히 나의 기준일 뿐이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나와 같은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있고 그 또한 잘못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난 인류가 수만 년을 살며 찾아낸 (현재로서) 가장 합리적인 체계가 수정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계라는 것에 동의하고, 인류 의식의 엄청난 진보가 없는 한 극좌파들이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세상은 탑다운으로 만들어지는 시스템의 수정만으로는 결코 도래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엄청난 부작용을 만들 것이라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누군가는 이 시스템을 굴려야 한다.
나는 시스템을 열심히 굴리는 대신 시스템의 변방에서 어떻게 좀 더 나답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궁리하는 거고. 모두가 시스템에 참여할 필요도 없고,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많아지다 보면 또 인류 의식은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갈 수도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