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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 Oct 10. 2018

번아웃 극복중

작년 중반부터 회사로부터 도망가버리고 싶고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올해 요가를 열심히 수련하면서는 정신적으로도 많이 강해졌고 상황들도 좋아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빈도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이미 번아웃되어서 지쳐버린 상황에서 짊어져야 하는 책임감과 의무가 점점 늘어나면서 매일 아침 눈을 떠서 회사에 가는 일이 더이상 즐거운 일이 아닌 회피해버리고 싶은 일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너를 믿으니까 너는 잘 할 거라고 위로했다. 그렇게 이야기 해준 사람들은 모두 나를 너무나 아끼고 믿어주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 이야기들은 위로가 아니라 더 큰 부담으로 나를 짓눌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엄청 야망이 많고 욕심이 많아서 승진을 쟁취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남들앞에 나서는 건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남이 알아주는 것과 상관없이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내가 옮다고 믿는 방향으로 실행해서 성과를 내는 것이 제일 중요한 나에게 실무에서 멀어져서 전략과 매니지먼트 그리고 보고에 신경써야 하는 승진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회사는 나에게 그 역할을 요구했고, 회사호구인 나는 회사를 위해서라면 나의 호불호쯤은 충분히 감당해야 한다고 여기며 독이든 성배를 받아 들었다. 


갑자기 변경된 업무 영역에 배워야 할 것들은 산더미 같았는데, 도무지 배우고 싶은 열정과 동기가 생겨나지를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집중이 안되고 미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건 열배쯤 더 어려웠다. 사람들은 각자의 불만과 좌절을 내게 토로하는데, 나는 해결책은 커녕 그 다양한 감정들로부터 나 스스로를 지켜내는 것도 벅차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도망가고 싶고 사라져버리고 싶은 날들이 이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만둬버리고 싶었지만 나를 믿어준 회사와 오피스에 너무 큰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그리고 여자를 승진시키면 포기해버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버티고 버텼다.


구원의 줄 처럼 요가를 시작했다. 매일 내 안에 쌓인 먼지와 감정의 찌끄러기들을 요가를 통해서 정돈시켰다. 적어도 요가를 하는 70분의 수업시간 만큼은 일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 할 수 있었고, 이 시간을 통해 하루를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퇴근하고 요가할 생각에 힘을 내면서 출근을 했다. 선생님이 해주시는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콕 박혀서 마음의 근육을 만들었고, 몇 달의 꾸준한 수행 덕분에 몸 뿐아니라 마음의 근육들이 조금씩 단단해져갔다. 그리고 올 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어느 날, 더이상 출근길이 힘들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 바닥을 치고 많이 올라와 있었다. 


정신적 번아웃에서는 많이 회복되었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아이디어가 솟아나고 해보고 싶은 것들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았다.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회사 관두면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고 얘기 할때 나는 만약 회사를 관둔다면 뭘 하고 싶을까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늘 고민이었는데,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이 고민이었다. 예전에는 회사를 관두고 이것저것 해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말만 하지 말고 행동을 하라고 이야기 했었는데, 언젠가부터는 해보고 싶은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새로운 직책에 맞게 배워야 하는 일들도 생각보다 빨리 배워지지 않았다. 어찌어찌 일을 해나가고는 있었지만 스스로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열심히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를 몰아세워도, 업무시간에 집중이 잘 안되고, 머리도 빠릿빠릿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우리 회사에는 5년 이상 일한 임직원들에게 안식휴가를 주고 있는데, 새로운 직책을 맡게 되면서 안식휴가를 써야하나 말아야 하나 일년 가까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휴가를 쓰며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새롭게 맡은 일을 아직 제대로 해내고 있지도 않은데 휴가를 쓰는게 과연 맞는 일인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옳아매며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친구의 소개로 애니어그램 상담을 받게 되었다. 나는 지금껏 내가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7번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나는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다가 나를 잃어버리는 9번 호구형 인간이었다. 상담선생님은 인간에게는, 사회적 본능, 성적본능, 자기보존 본능, 이렇게 세 가지의 본능이 있는데 나는 회사와 타인에게 나를 맞추느라고 자기 보존을 전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생각해보니 회사의 이익과 나의 이익이 갈등을 빚을때에는 무조건 회사의 이익을 선택했다. 야근과 개인 약속이 겹치면 무조건 야근을 선택했고, 출장과 개인 여행이 겹쳐도 무조건 출장을 선택했다. 이번에도 쉬고 싶다는 개인의 욕구를 회사에서 일을 좀 더 잘해야 한다는 회사를 위한 필요로 인해 누르면서 스스로를 희생시키고 있었다. 상담을 받고나니 그동안 왜이렇게 힘들었는지 명확해졌다.  나를 좀 더 돌봐주고 내가 우선인 선택을 하며 사회나 타인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했다. 


우선은 안식휴가를 쓰기로 했다. 조마조마 하는 마음을 안고 매니저에게 이야기 했는데 너무나 선뜻 다녀오라고 이야기를 해준다.  12월 중순 부터 두 달 정도 쉬면서 요가도 배우고 명상도 배우고 여행도 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이 기간에는 메일도 하나도 안읽고 회사 업무는 전혀 신경도 안쓰면서 지내려고 한다. 이렇게 휴식을 시간을 만들어 놓으니 마음에도 예전에 없던 여유가 생기고 하고 싶은 것들도 다시 하나 둘 생겨난다. 아직 갈길이 멀었지만, 업무에 집중하고 일을 처리하는 속도도 예전보다 빨라진 것 같다. 변한 건 하나도 없는데 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나한테는 휴식이 필요했던 건데, 그걸 안주고 6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미친듯 달려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나에 대해 배우고 나에게 필요한 것들 주었다는 생각이 드니 대견한 마음도 든다. 아직 번아웃이 100% 극복되었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조금씩 출구를 향해 가까이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언젠가는 여기에 번아웃 극복기를 쓰게 되는 날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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