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주 종종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과로 갈지 문과로 갈지 정하는 상담 시간이었다. 내 상담을 맡은 선생님은 하필 윤리과목 담당 선생님이었다.
"수학도 잘하고 과학도 잘하니까, 이과 갈꺼지?"
"저는 음... 아직 뭘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는데, 역사도 너무 재미있고, 철학도 관심이 있어서 철학과도 가고 싶어요."
철학과라니? 어어이없어 하던 선생님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은지야, 철학과나 사학과에서 배우는 건 너가 그냥 책 보고 공부해도 되. 근데, 그걸 전공하면, 너는 선생님 말고는 할 게 없어. 이과 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를 가거나, 아니면 약대를 가. 그리고 거기가서 철학이랑 역사 공부하면 되. 이과를 가면 공대에 가서 대기업에 취업을 하는 것도 쉬워. 그런데 철학과나 사학과를 가면, 너는 백수가 될거야."
그 때 가장 공포스럽게 다가왔던 건 백수가 된다는 것도 아니었고, 철학이나 사학을 전공해서 할 수 있는 직업이 선생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꽤나 설득적이었다.) 지금도 학교 다니는게 너무 싫은데, 학교를 겨우 졸업해도 학교에 다시 돌아와서 평생 학교에 다녀야 한다니, 생각만해도 아찔했다. 그 불상사만은 피해야한다. 나는 그렇게 별 생각도 반항도 없이 이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의대도 약대도 아닌 공대를 가게 되었다.
그 후 내 삶은 철학이나 사학과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였지만, 그보다는 바로 앞에 당면한 삶의 과업들을 수행하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공대 공부는 당연히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철학과를 꿈꿧던 고등학생 때보다 나는 좀 더 현실적이 되어있었다. 당장 졸업하면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할지,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나는 경제학을 공부했고, 개발도상국의 구호에 관심을 가졌다. 가만히 앉아서 정답도 없는 삶의 문제들을 고민하는 것보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나와 남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애쓰며 일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름 치열한 시간들을 살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수 많은 방황을 했고, 그 방황안에서 나름 최선을 다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또 열심히 놀았다. 내가 맡은 자리에서 많은 것들을 달성했지만,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의미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 돈을 번다는 것, 승진을 해서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간다는 것,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다는 것,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된다는 것, 멋있는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것, 그 어느 것도 지속적인 만족과 성취를 주지 못했다. 오히려 무언가를 달성할 때마다, 더 큰 허무함이 찾아왔다. 결국 내가 꿈꾸던 곳에서 나를 반기고 있는 건 결국 깊은 허무와 쓸쓸함 뿐이었다. 다양한 성취는 내면의 나를 더 좌절하고 쓸쓸하게 만들 뿐이었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는 아주 잦은 빈도로 깊은 우울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 우울은 이유 없이 찾아와서 아주 깊은 곳으로 자신을 데려 간다고 했다. 우울이라는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나는, 그 친구의 우울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와 비슷한 빈도로 허무감을 느낀다. 이유없이 찾아오는 허무는 내가 발디디고 살고 있는 현실의 모든 것들이 부질없다고 이야기하며, 인생살이를 공허하고 쓸쓸하게 만들어버린다. 예전에는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찾아오는 허무감을 마냥 피하고만 싶었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나란 인간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 허무감을 좀 더 잘 느끼도록 설계된 인간이라고. 누구나 각자만의 작동방식이 다르고 약한 부위가 다르다. 나는 허무에 취약한 타입으로 태어났고, 그 친구는 우울에 취학한 타입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건 이번생을 살면서 내가 풀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이 허무와 공허를 끌어안고 살아가면서, 나와 세상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내면의 허무감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삶으로 그것을 경험하는 것말이다.
다행히도 요즘은 이런 허무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완전히 느끼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테지만, 생리 전, PMS 증후군 때문에 가장 까칠한 며칠의 날들을 제외하고는, 그저 내가 해야하는 일들을 하루하루 해나가고, 그 사이에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에 적당한 만족과 적당한 행복을 느낀다. 물론 적당한 스트레스도 있지만 말이다. 이 허무감에서 벗어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명상과 공부이다. 명상은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도와주고, 공부는 있는그대로 본 것들을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붓다는 '색즉시공 공즉시생' 이라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공하다 라고 이야기 하였다. 명상을 통해 있는 그대로 보면,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깨달음은 헛된 욕심에 집착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존재를 자유로 안내한다. 하지만 나 같이 허무함이 기본 필터로 장착되어 있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깨달음이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라는 허무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다. 붓다가 이야기 한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내가 있는 그대로 본 것이 삶의 진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공부하고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아.. 서론이 너무 길어졌는데, 그래서 요즘은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있다. 왜 명상을 하면서 붓다의 가르침이 아닌 노자의 가르침을 먼저 공부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노자가 나한테 왔다. 예전에 도덕경을 읽었을 때에는 하나도 이해를 못했는데, 이제는 그래도 조금씩 이해가 된다. 도뎍경은 참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 다양한 해설서를 함께 읽고 다양한 유투브 강의들도 찾아보는데, 아직 100% 마음에 드는 해설서는 못찾았다. 결국 현대에 노자를 읽는 다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으로 필터링되어 해석된 노자를 읽는 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노자 뿐 아니라 모든 오래된 경전이나 고전이 그러할 것이다.
이번주에는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을 계속해서 되뇌이면서 살았다. 도올선생님의 해석과 최진석 교수님의 해석, 그리고 윤홍식님의 유투브 강의를 듣고 다양한 해석서를 읽고 있는데, 한 글자에 있어서의 작은 해석의 차이가 노자의 세계관을 이애하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이 놀랍다. 어떤 사상이든 머릿속에 있는 것이 말로 옮겨지면 왜곡되고 그 전체를 담을 수 없다. 그러기에 노자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 할 수도 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들의 해석을 발판으로 나만의 해석을 해보기로 한다.
내가 만나고 해석한 노자에 대해서 조금씩 글을 써보려 한다. 이 바쁜 스타트업 창업의 길에서 나 혼자 재미있는거 빼고는 딱히 할 이유가 없는 이런 일을 왜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 그 때 고등학교때 선생님이 이야기 한 것처럼, 철학도 역사도 결국 나 혼자 공부할 수 있으니까, 그 결과들을 조금씩 공유해보고 싶다. 이과를 선택하지 않고 그 때 문과에 가서 정말 철학과나 사학과에 진학했으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나는 인생의 참 좋은 타이밍에 노자를 만난 것 같다. 아마 20살때 만났으면 이해안된다고 도망갔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