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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 Nov 08. 2020

브로콜리 너마저가 소환한 퇴사의 추억

브로콜리 너마저 1집을 의식처럼 매일 챙겨듣던 그 때,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대학생활 내내 NGO와 사회적 기업에 빠져있던 나는,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현실에 타협한채 석유화학회사에 입사 했다. 내가 맡은 일은 회사에서 만드는 에틸렌, 부타디엔, SM, PX 같은 석유화학 제품을 수출하는 업무였다. 공장과 소통하며 재고를 확인하고 선박 일정과 출하 일정들들 확인하고, 매일 아침 바뀌는 유가와 환율을 확인하며 회사의 손익을 뽑아 보고하고, 석유화학 제품의 시황을 매일 체크해서 최대한 높은 가격에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제품을 트레이더들에게 판매하는 것이 내가 맡은 일이었다. 플라스틱으로 대표되는 석유화학 제품은 현대 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재이지만, 더 높은 가격으로 더 많이 파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 회사의 목표가 나에게는 영 맞지 않았다.


강력한 현타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사건때 찾아왔다. 회사에는 커다란 티비가 있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던 날, 모두가 놀란 마음으로 티비를 지켜보는데, 누군가 '공장 꺼지면 가격 오르겠네' 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의 이야기는 100% 맞는 말이었다. 석유화학 가격은 공급에 매우 탄력적으로 변동한다. 수요가 꾸준히 상승하는 상황에서 공급이 갑자기 줄어들면 가격은 폭등한다. 동일본 대지진은 수 많은 사상자를 낸 동시에 일본에 있는 많은 석유화학 공장들을 풀스탑 시켰다. 그 덕에 우리 회사가 판매하고 있는 석유화학 제품들의 가격은 폭등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fact  에 의거한 말을 내 뱉은 것일 터이지만, 수천, 수만명의 죽음과 비극 앞에서 가장먼저 떠올린다는 것이 내가 판매하는 제품 가격의 변동이라는 사실이 소름이 끼쳤다. '여기 좀 더 있으면, 나도 똑같은 식으로 사고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퇴사의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이 날, 티비 앞에서 들었던 이 한 마디는 퇴사 일자를 촉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새벽 6시 30분에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지 못한 날이면, 교대역의 지옥같은 환승을 거쳐 강남역으로 출근을 해야했다. 회사 건물 지하에는 커피빈 매장이 있었는데, 여기서 늘 티라떼를 하나 사들고, 브콜너 혹은 킨의 음악을 들으며 엘레베이터를 타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분명 출근시간은 8시인데, 나는 8시 전까지 손익 보고서를 임원들에게 보내놓아야 했다. 커피빈 티라떼를 홀짝홀짝 마시고 서울대를 졸업했지만 음악이 좋아서 밴드를 하는 용감한 브콜너의 음악을 들으며, 차마 회사를 그만둘 용기가 없었던 나는 유가를 체크하고 환율을 체크하고, 우리가 판매하는 제품가격들을 업데이트 해서 매일 아침 기계처럼 메일을 보냈다.


어떻게 퇴사를 할 용기를 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분명 나는 아직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그냥 입이 말을 해버렸다. 야근을 하다 충동적으로 사수 선배에게 잠깐 커피를 마시자고 이야기를 했고, 늘 즐겨가던 그 카페에 갔고, 머리는 아직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입이 먼저 떨어져 버렸다. '저 회사 더이상 못다닐 것 같아요. 그만 두려구요.' 그리고 선배 앞에서 펑펑 울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깟 회사 그만두는게 뭐가 어려웠을까 싶기도 한데, 그 때의 나는 스물 여섯이었고, 엄마는 암 판정을 받아 수술을 받은 후 아직 완치 판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컴컴한 터널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선배에게 말하고 펑펑 눈물을 쏟아버리고, 나는 친구와 함께 소매물도로 여행을 갔다. 통영으로 향하는 야간 버스 안에서 친구와 수다를 떨다 잠들기 전 브콜너의 음악을 들으며 다짐했다. 나도 이들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해보겠다고.


돌이켜보면 정말 퇴사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었는데, 말이 밖으로 나가버리니, 정말 퇴사를 해버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때 회사를 그만 둔 건 신의 한 수, 인생의 터닝 포인트이지만 이 때는 내가 정말 맞는 결정을 한 건지 두렵고 무서웠다. 게다가 나를 유난히 좋아해주던 인사팀 선배는 나의 퇴사 소식을 듣더니 진지하게 나를 불러 '내가 인사팀에 있어봐서 아는데,  ## 퇴사하고 더 잘 된 케이스 하나도 없으니까 잘 생각해봐.' 라고  이야기 했다. 나를 아끼니 해준 말일 테지만, 저 말을 듣고 생각했다. '## 나가서 훨씬 잘된 케이스, 제가 보여 줄게요.' 내가 그의 기준으로 퇴사해서 더 잘된 케이스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 나는 퇴사 후 훨씬 행복하고 통합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그의 말은 이제 더 이상 사실이 아닐 것이다.


퇴사를 한 후, 그토록 경험해보고 싶었던 사회적 기업에서 일할 때, 브로콜리너마저 1집을 들으며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이해하지 못해도, 내가 좋으면 정말 어쩔수 없는 거구나... 그래서 브콜너는 음악을 해야하는 거고, 나는 연봉을 1/4 로 받으면서도 굳이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을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구나 라고.


며칠 전 오랜만에 우연히 브콜너 1집을 들었다. 그 시절의 막막함과 먹먹함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 브로콜리 너마저도 청년보다는 중년에 더 가까워졌고, 나도 어리버리 신입사원에서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했는데,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 강남역 4번 출구 엘레베이터를 오를 때의 절망과 막막함이 떠오른다. 그 시절 두려움을 뒤로하고 변화를 선택한 덕분에 지금의 나는 그 절망과 막막함을 과거로만 추억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참 감사한 일이지만...


그 시절 매일 브콜너를 듣지 않았다면, 그 때 그 선배에게 '저 그만 둘게요.' 라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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