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치가 이끄는 비통합 & 모순적인 삶에 대하여
인간은 먹고사니즘 그 이상을 추구한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먹고사니즘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히 생존의 욕구만 채우고자 하는 동물은 아니다. 매슬로의 욕구이론만 보더라도 생존의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면 인간은 곧바로 소속감과 인정, 명예를 추구하기 마련이고, 궁극적으로는 자아실현과 자아초월을 추구하고자 한다.
(흔히 매슬로의 욕구이론을 5단계 자아실현까지 알고 있는데 매슬로는 추후 자신의 이론을 보완하여 깨달음 혹은 신/우주정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자아 초월까지 이론을 확장하였다.)
나 역시 먹고사니즘을 추구하지만, 먹고사니즘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각기 추구하는 욕구의 종류는 다를터인데, 나에게 있는 가장 큰 욕구, 혹은 결핍은 나의 신념 혹은 생각대로 통합되어 살고 싶다는 욕구이다. 나는 나의 신념과 행동이 불일치하게 되면 꽤 큰 정도의 괴로움을 느끼는데, 아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자신의 신념과 먹고사니즘의 충동사이에서 어느정도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충동을 느낄 때 빠르게 자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곧 적정한 선에서 세상과 타협하며 처음의 경험했던 모순과 충동을 잊어버린다. 인정욕구나 물질에 대한 욕구가 아주 큰 사람의 경우 이런 모순과 충동을 전혀 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고, 알아차린다 해도 비교적 쉽게 극복(?)이 가능한 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기존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계승하는 것을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모순마저도 당연한듯 받아들이며 시스템적 모순을 바꾸는 것보다는 적절하게 유지보수하며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신념대로 사는 삶이 어려운 이유 : 탐욕, 성냄, 무지
내가 괴로웠던 것은 이러한 충동과 모순을 너무나 강렬히 느끼고, 여기에서 오는 모순과 비통합에 괴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비통합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꽤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명상학을 공부하고 심리학과 철학, 특히 불교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나의 마음이 왜 이리 괴로웠는지 파악할 수 있었는데, 내가 나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붓다가 삼독이라고 이야기했던 탐진치 때문이었다. 나는 특히 낮은 주파수의 상태에 머무를 때 이 삼독에 의해서 결정을 내렸고 그것이 가져오는 모순적인 상황에 괴로워하곤 했다.
자본주의의 가장 좋은 친구, 탐욕
탐진치의 첫번째 탐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심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더 가지고, 더 성장하고, 더 먹고, 더 사는 것이 '옳은 것'이고 인간이 발견한 삶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시스템이라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본 적이 없는 사람은 물질적 풍요가 주는 허망함에 대해 깨닫기 어렵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은 끊임없이 더 가지고자 하는 탐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탐욕이 주는 허망함을 알아차리고 탐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탐심은 비단 물질적인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정신적인 것에 대한 탐욕은 더 큰 괴로움을 낳기도 하는데, 더 인정받고 싶고, 더 잘나가고 싶고, 더 알고 싶은 것 또한 탐심에 속할 것이다. 나는 물질적인 탐심에서는 꽤나 많이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정신적인 탐심에서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뭐든 더 알고 싶고, 더 알고 나면 삶에 대한 비밀이 펼쳐질 것이라는 허황된 욕심은 근본적으로는 물질에 대한 욕심과 다를바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그마한 바램은, 내가 가졌던 물질적인 것에 대한 탐심이 어느정도 물질적 풍요를 얻은 후 그 허망함을 깨닫고 내려놓아졌던 것처럼, 정신적인 것에 대한 탐심역시 어느정도 성취를 이룬 후 그 허망함을 알게 된 후 내려놓아지는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될런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싫으면 미워하는 마음, 진애 (성내는 마음)
탐진치의 두번째는 진애, 즉 성내는 마음이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싫어하고 분노하고 불쾌해하는 감정인데, 나 역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르다고 꼬리표를 붙이게 되고 불쾌한 감정이 떠오른다. 탐욕이 자본주의와 달라붙어 우리를 괴롭게 한다면, 분노하는 마음인 진애는 민주주의와 쌍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인가부터 정치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보다는 딱 두편으로 나눠서 우리편은 옳고 너네편은 다 나빠라는 식의 사고가 사람들 사이에서 팽배해지게 되었는데, 이렇게 나와 다르면 옳지 않고 나쁘다는식의 태도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장 큰 방해물이다. 나만해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급진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몇몇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적 견해를 띄고, 또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내편/네편 나누고 그 사이에 있는 수 많은 다름을 무시하는 양당체제에서 이런 다름은 이해받기 쉽지않다.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의 발언권이 보장되며, 누구든 자유롭게 보복을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탐욕보다 진애가 더 알아차리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탐욕의 경우에는 지행합일이 어렵다는 단점은 있지만 어느정도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기 어렵지 않은데, 진애의 경우 내가 옳다라는 마음과 결부되면 마치 성냄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정의의 투사가 되거나 옳음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하게 이해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진리를 모르는 것, 무지
마지막으로 치, 즉 무지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무지는 진리를 모름에서 오는 무지이다. 진리를 모름으로 우리는 세상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좋아하는 것은 탐하고 싫어하는 것에는 화를 낸다.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물론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굳이 부처님 말씀에만 한계를 두지 않고 다양한 철학자들, 사상가들, 종교인, 성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결국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이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리의 탐구에 있어서도 무지를 벗어나는 것은 중요하지만, 옳은 신념을 수립하기 위해서도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무지에 의해서 나오는 어리석음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좋으며, 어렸을적 무지에 의해 비롯된 그른 행동은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툭툭 털어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나이가 먹을 수록 이 말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데, 진리를 앎으로써 뭣이 중헌지 알게 되었을때 오는 엄청난 자유와 해방감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진리가 어깨를 무겁게 누르는 것 또한 사실인데, 진리를 모르고 행하는 어리석음은 몰라서 그렇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행동이 진리에 반하여 움직일때에는 이 비통합이 가져오는 괴로움을 느낄수 박에는 없기 때문이다. 모르고 하는 도둑질은 맘이라도 편하지만, 알고 하는 도둑질은 마음과 영혼을 파괴해버린다.
알면서도 지키지 못할 때, 가장 괴롭다
이는 비단 진리에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역시 알면 알수록 세상이 보여주는 부조리함에 경악하게 되는데, 그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관성에 의해 혹은 탐욕에 의해 비통합된 행동을 하게 될 때 나는 가장 큰 괴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고, 그냥 모르는채로 어린이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어 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태도는 분명 장기적 관점에서 옳은 행동은 아니지만, 속도조절을 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통합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법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복잡해졌고, 신념과 100%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몇몇 급진적인 근본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회귀시켜야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발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미 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변화는 되돌리기 어렵다. 비행기가 환경오염의 주범이니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환경파괴자이고, 우리 모두 비행기를 타지 말아야 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친환경 비행기를 개발하는 편이 더 빠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소셜미디어와 구글이 개인정보를 마음대로 유용하고, 인간의 무의식을 조종한다는 것에 맞서 구글과 페이스북을 없애버리자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일 뿐더러 만약 그렇게 없앤다 하더라도 또 다른 무언가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순응하며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을 구분하여 보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꽤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시적인 문제를 개인이 해결하고자 하면 커다란 벽에 부딪힌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고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모든 거시적인 문제들은 수 많은 미시적인 것들이 합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러니, 나의 삶의 미시적인 부분에서 조금씩 비통합된 부분들을 수정해나가며 나의 삶에서부터 변화를 만들어 나간다면 절망에 빠지지않고 훨씬 더 능동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친 위대한 사람들은 남을 바꾸려 하는 대신 자기자신을 바꿨다. 남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고자 한 사람들이 세상을 얼마나 망쳐놓았는지는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를 보면 너무나 잘 알수 있다. 소셜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문제점에 대해 비판의식이 든다면, 나부터 소셜미디어를 바르게 이용하고자 하고, 아동착취에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나의 소비부터 변화시켜 착취없는 방법으로 물건을 생산하는 브랜드로부터 옷을 구입하는 식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신념대로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통합적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과 만나 교류하고, 매일 명상이나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은 생각보다 더 많이 도움이 된다. 변화는 확실히 온다. 다만 내가 원하는 속도만큼 빠르게 오지 않을 수도 있고, 때때로 뒤로가는 것 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