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비장애형제자매들에게
비장애형제자매에게 '죄책감'은 자주 찾아오지만 다루기는 어려운 불청객이에요. 비장애형제자매에게 '죄책감'이 왜 생기는지, 이 감정을 다루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 나눠 볼게요.
(편의상 이 글에서도 비장애형제자매를 동글이, 장애형제자매를 세모라고 칭할게요.)
유아기는 아직 감정이 미분화되기 전이에요. 그래서 '죄책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요. 하지만 한편으로 유아기는 자아가 형성되는 핵심적인 시기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중요한 시기인 유아기에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바탕이 돼요. 따라서 주변 일이 잘 되어도, 잘 못 되어도 그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게 돼요.
'세모의 장애가 나 때문인가?'
'엄마아빠는 세모만 돌봐주네. 내가 세모만큼 안 예쁜가 봐.'
'아빠가 세모한테 화를 내네. 내가 잘 못하니까 더 화가 나서 그런가 봐.'
유아기부터 무의식에 내재되는 이런 생각들은 이후 동글이가 청소년기, 성인기에 느끼는 죄책감에 큰 영향을 주게 돼요.
아동기 때부터 '죄책감'이 서서히 감정의 수면 위로 떠올라요. 이기심과 이타심이 충돌하는 동시에, 유아기 때부터 느낀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는 시기이지요. 엄마가 세모만 돌봐주어서 세모가 밉다고,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나쁜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청소년기부터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인식하기 시작해요. 이 시기에 동글이가 느끼는 죄책감은 대체로 '부담감'에서 기인해요. '시험을 잘 못 봤네. 세모가 장애가 있으니까 나라도 잘해야 하는데.' 같은 생각이 대표적이지요.
이 시기에 동글이가 으레 듣는 말이 있어요.
"넌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공부하는 게 엄마아빠 도와주는 거야."
동글이도 분명 가족의 한 구성원이에요. 하지만 가족 구성원으로서 세모를 대하는 일에서는 철저히 배제된 채, 공부하라는 말만 들어요. 그런데 학업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동글이의 죄책감은 더 심해져요.
'부모님이 공부에만 신경 쓰라고 했는데, 난 이것마저도 제대로 못하네.' 이런 생각도 같이 드는 것이지요.
장애는 '낫는 것'이 아니기에, 동글이와 그 가족의 삶은 20년이 지나도 대체로 비슷해요. 하지만 동글이는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나이가 되었어요. 동글이는 학교가, 직장이 멀어서 가족과 떨어져 살아요.
'집에서 나와서 나 혼자만 편하게 살고 있네. 자주 보러 가지도 못하는데. 나 너무 이기적이다.'
이런 생각을 종종 해요. 친구들과 놀러 갈 때도, 불현듯 '가족들은 집에서 세모를 돌보고 있는데, 나만 즐겁게 살고 있어.'와 같은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오지요. 가족과 같이 살더라도, '여전히 부모님을 돌봄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했어. 어른이 되면 내가 멋지게 해결할 줄 알았는데.'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 감정은 '어긋난 죄책감'이에요. '죄책감'의 사전적 정의는 '잘못을 했을 때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에요. 하지만 세모의 장애로 인한 가족의 상황은 동글이의 잘못이 아니에요. 잘못을 한 적이 없기에 느끼지 않아도 될 감정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려오는 죄책감을 다루기 위해 저에게 효과적이었던 방법 3가지를 소개할게요.
'내가 그 날 가장 많이, 또는 강하게 느낀 감정과 관련된 내용을 적는 것'
저는 Pixels라는 앱을 이용해 감정일기를 쓴지 7년차가 되었는데요. 제 감정일기에는 3가지 내용이 들어가요.
어떤 감정을
어떤 상황에서
어느 정도로 느꼈는가?
(1부터 10까지, 10이 가장 심하게 느낀 정도)
예) 24년 7월 7일 감정 일기
죄책감
이번 주에는 세모를 보러 본가에 가지 못해서, 나 혼자만 편하게 쉰 것 같아서
8점
(*첨언일기에는 한 가지 감정만 쓸 수도, 여러 가지 감정을 쓸 수도 있어요. 좋은 감정, 나쁜 감정, 애매한 감정 등 감정의 종류도 다양하게 등장해요.매일 쓰지 못해도 감정일기 데이터가 어느 정도 쌓이면, 내가 어떤 상황에서 특히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지 알 수 있어요. '내가 시험을 잘 못 봐서 부모님을 실망시켰다고 느끼는 상황'일 수도 있고, '세모를 돌보는 부모님을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느끼는 상황'일 수도 있겠지요.)
감정일기는 막연하게 죄책감을 느끼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 주고,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시작점이 돼요.
'죄책감이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합리적인 생각으로 바꾸기'
'세모가 장애가 있다고 내가 꼭 더 잘해야 하나? 시험을 좀 못 볼 수도 있지. 어떻게 매번 잘해?'
'내가 꼭 지금 부모님을 도와드려야 하나? 가족이랑 같이 사는 내내 힘들었잖아. 나는 내 삶을 온전히 행복하게 살아내기 위해 태어난 거야.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게 부모님을 도와드리는 거야. 부모님도 내가 매 순간 함께 세모를 돌보면서 힘들어하는 걸 바라지는 않아.'
똑같이 죄책감이 들더라도 이 감정을 더 빨리 알아차리고, 더 빨리 벗어날 수 있게 돼요.
(*첨언: Ellis의 합리정서행동치료(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 REBT)에 일부 기반한 내용이에요. 이 내용이 더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로!)
이건 주로 성인기의 동글이에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가족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허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세모의 돌봄에 함께 참여하는 거예요.
"제가 시험기간이 아닐 때는 일주일에 두 번 세모를 데리고 30분 정도 산책을 다녀오면 어때요? 그 정도는 이제 저도 할 수 있어요. 평일에 세모를 같이 돌보지 못해서 제가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 정도면 저도 좀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요."
"매 달 둘째 주 토요일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는 내가 세모랑 있을게. 그동안 엄마아빠는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와. 대신 나랑 세모 것도 사다 줘."
물론 이 가족 계획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하지만 이렇게 세모의 돌봄에 참여하는 범위가 정해지면, 동글이의 죄책감과 스트레스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요. '나는 가족에게 필요한 존재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고, 부모님도 나와 뜻을 같이 한다'는 믿음이 불안감과 죄책감을 덜어주기 때문이에요. 가족의 분위기에 따라 청소년기인 동글이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이 방법은 가족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해요. (그래서 저도 아직은 완전히 실행하지 못하고 있어요...) 만약 가족과 이야기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스스로 그 경계를 명확히 해 보는 것도 도움이 돼요.
'나는 한 달에 한 번만 가족을 보러 갈 거야. 나는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힘들고, 무엇보다 지금은 내 미래를 위해 시간을 투자해야 해.'
(이는 가족 미래 설계와도 관련이 있어요.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할게요.)
비장애형제자매로 태어난 이상, 죄책감을 한 번도 느끼지 않고 살아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감정을 잘 어르고 달래서 공존할 수는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동글이들이 어긋난 죄책감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면서... 다음 주에 또 다른 글로 찾아올게요.
2024년 7월 7일 뉴닉(NEWNEEK)에 기고한 글을 재구성한 글입니다.
https://newneek.co/@lemon99/article/1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