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외할머니집에서 생긴 일
나의 어린 시절은 외할머니댁의 향기가 짙다.
만 나이로 4,5살 정도였을까.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언제부터인지 엄마와 동행한 외할머니집에는 나만 남겨져 있었다. 엄마는 내가 울까 봐, 엄마를 따라 부산에 간다고 할까 봐 도망을 친 거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그 기억이 나쁘지만은 않다. 외할머니집에서의 생활이 아주 큰 즐거움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 외할머니집은 경북 울진과 영덕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고, 대문을 열면 바다가 있었다. 대부분이 어업을 하는 마을이어서 늦은 오후면 동네가 가득 찼다. 나는 네발 자전거를 타고 순찰 비슷한 걸 했다. 그러다 지나가는 나를 본 어르신들은 나에게 먹을 거 하나라도 입에 넣어줬다. 그도 그럴 것이 청소년도 거의 없는, 아이가 귀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외조부모님이 지극정성이었다. 지금은 나이 터울이 큰 동생이 두 명이지만 당시에는 외동처럼 자랐다. 그래서인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자기네 인생에 첫 손주에게 정성을 다한 것이다. 물론 혼나는 일도 많았다. 할아버지가 보던 TV 채널을 맘대로 바꿔서, 편식을 해서.
그러던 어느 날, 집이 북적거렸다. 엄마가 온 것이다. 기억으로는 두 이모도 같이 온 것 같은데 이미 마을은 어른 나의 놀이터였기 때문에 엄마가 와도 네발 자전거를 타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옆집 할아버지께 인사하고 집 뒤에 있는 솔나무밭에도 가고.
그러다 집으로 돌아갔는데, 엄마인지 이모인지 나에게 돈을 쥐어 주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라고 한 거다. 신이 났다. 할머니집에 달달한 음식이라고는 할아버지가 자주 드시던 계피사탕밖에 없었는데! 나는 곧바로 작은 다리를 휘저어 구멍가게가 아닌 집에서 좀 떨어져 있는 큰 가게에 갔다. 아이스크림이라니. 신중하게 아이스크림 하나 골라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가족들이 나를 보고 놀라는 것이다!
- 벌써 왔어?
엄마가 당황했다. 그 뒤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 지끼미 시파께가 아이스크림을 하나만 사 오나!!
*지끼미 시파께 : 경북 사투리로, 정확한 뜻은 모른다. 욕이겠지.
그렇다. 어른들이 나에게 쥐어준 돈은 꽤 큰돈이었고, 가족이 여럿이었으니 그만큼의 양을 사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생각한 거다. 엄마는 그 사이에 도망가려 했고. 그런데 나는 내가 먹을 아이스크림에만 몰두해 하나만 사 왔고 그 때문에 가족들의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빨리 돌아온 것이었다.
- 엄마 꺼 사 오라고 안 했잖아.
그렇게 난 가게로 향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스크림을 한 무더기를 든 채로. 기억엔 다시 돌아왔을 때 가족들은 모두 떠난 상태였다. 외할머니만이 마당에 있었고 가족들이 남기고 간 온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조차도 웃음이 난다. 나름 대가족이었는데 내 거만 사 오다니. 아이였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가족들이 또 몰래 떠날까 봐 불안함에 집에 빨리 돌아온 걸까. 분명 그랬던 전적이 있었던 거야. 그럼 엄마가 나 혼자 할머니집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았던 이유는? 도망가지 않고 다음에 또 오겠다고, 잘 설명해 줬으면 됐잖아. 어린 엄마여서? 방법을 몰라서?
아, 갑자기 서러워지네.
엄마! 해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