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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몽드 Jul 31. 2023

16. 헤아릴 수 없는

오직 본인만 아는

자리에 앉아서 본 가게 입구

2주간 홀로 베트남 여행에 나서고 다낭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다낭에서의 모든 순간이 행복했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바로 술. 평소 술을 빼지 않고 마시는 알코올 러버라 야시장에서 밤까지 남아 있는 한낮의 열기를 식히고자 했지만 유흥가에 대한 겁이 많아 홀로 숙소에서 한 캔씩 마시곤 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한캔이 두캔이 되고 두캔이 세캔이 되고... 그러다 보니 눈이 감기기는 커녕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당장 모자를 눌러쓰고 거리로 나섰다. 그때가 밤 11시 가까운 시각이었다.


구글 맵을 켰다. '쌀국수 24시간'. 검색을 하니 숙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문을 닫지 않은 쌀국수 집이 있었다. 연중무휴 24시간 운영이라니. 빨리 먹고 숙소로 돌아와야 겠다는 생각에 최단거리를 검색했다. 가로등도 인적도 없는 거리를 재빨리 걸었다. 가는 길에 만난 수많은 쥐와 바퀴벌레들. 몇 번이나 화들짝 놀라며 쌀국수로 향했다.


저 멀리 사람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때쯤, 가게의 불빛이 보였다. 불빛의 근원은 새벽 5시까지 운영하는 야장 술집이었다. 쿵쾅거리는 음악소리, 사람들의 대화소리, 맥주병을 시원하게 따는 소리 그리고 주방에서 나오는 후덥지근한 연기들. 


외로웠다. 왜일까. 혼자 오지 않았으면 저 분위기에 합류할 수 있었을까. 혼자 여행도 좋지만 다음엔 꼭 친구랑 와서 나도 즐겨야지.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쯤, 지도는 24시 쌀국수 집에 도착했다고 알렸다. 술집 바로 맞은편. 맞은편 가게 분위기와는 다르게, 매우 조용했다.

가게와 이어져있는 집

문도 없는, 오픈형 가게. 왼쪽에는 작은 주방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25명 정도의 손님을 수용할 수 있는 홀이 있었다. 직원이 보이지 않았고 입구 쪽에 앉아 메뉴판을 살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베트남어를 모르니... 나는 구글맵 가게정보란에 있는 사진 중 가장 맛있어 보이는 쌀국수로 골랐다. 그렇게 5분 정도를 가만히 앉아있을 때, 가게 안쪽 문에서 사람 한 명이 나왔다.


동그란 얼굴에 160cm가 채 안되는 키. 머리는 아무렇게나 묶어 틀어올리고 잔머리가 땀에 절어 이마에 찰싹 붙어있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사람. 야채와 라임, 양파절임을 내 앞에 두고 나를 보았다. '뭐 먹을래?'라고 묻는 듯한 표정. 나는 사진을 가리켰다. '이거 주세요.' 그는 손바닥을 공기 중에 펼쳐보이며 양이 많은데 혼자 다 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 물론 베트남어로. 나는 "오케이오케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음식이 나왔다.

묵직한 맛의 쌀국수

지금까지와는 다른 맛의 쌀국수였다. 부속부위가 많이 들어가서인지 국물이 묵직했다. 나는 고추를 마음껏 퍼넣고 속 안에 남아 있는 맥주의 차가운 기운을 없앴다. 캬. 모자의 넓은 창 때문인지, 쌀국수에 너무 집중을 해서인지, 아니면 맥주 세 캔에 취해서인지. 이곳에 쌀국수와 나만 있는 것 같았다. 고독한 미식가처럼. 그런데 고개를 드니 그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니 그는 엄지손가락을 들으며 고개를 갸우뚱했고, 나는 "굿굿"이라며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가 내 앞자리에 앉았다.

 - 너 혼자왔어?

 - 나 혼자 왔어.

 - 너 진짜 대단하다. 어디서 왔어?

 - 나 한국.


그렇게 우린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나보다 3살 정도 많았고, 가게의 사장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베트남 남부에서 홀로 다낭에 와서 쌀국수 가게를 차렸다. 2년 정도 되었다. 하루에 4시간 정도 자는데, 적응이 되지 않는다. 피곤하다.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자신에게 사기를 쳐서 돈을 잃었다. 전남자친구는 자기에게 항상 돈을 요구했다. 나쁜놈이었다. 외롭다. 그런데 사람을 어디서 만나야 할 지 모르겠고, 좋은 사람이 없다. 나도 해외여행을 가고 싶은데 혼자 가기는 무섭다. 지난번에도 한국인이 한번 온 적이 있다. 그 손님은 남자였고 그 역시 혼자였다.... 이 외에도 우린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의 독백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강인한 사람이구나.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을 줄이면서까지 자신의 삶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구나. 그런데 의지할 데가 없는, 작은 쌀국수 가게에서 24시간 홀로 외로운 분투를 하고 있는 사람이구나. 쉼이 필요한 사람 같다.


그가 긴 이야기를 끝내고 머쓱한지 나에게 또 한번 쌀국수의 맛을 물었다. 나는 전처럼 "굿굿"이라고 하고 파파고를 켰다. 한국어를 영어로, 영어를 베트남어로 번역해서 그에게 보여줬다.


 - 당신은 멋진 사람이니까 좋은 일만 일어날 거야. 한국에 여행 오면 내가 가이드해 줄게!


내 화면을 본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어린 아이처럼 입을 삐죽했다. 그는 나에게 감동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베트남에서 가장 늦은 귀가였다.


그와의 대화가, 그곳에서 먹은 쌀국수의 맛이 두달이 지난 지금에도 진하게 남아있다. 좁은 공간에서 365일 20시간을 일하는 그는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그리고 앞으로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의 큰 눈동자가 생생하다. 이마에 눌러붙은 머리카락도. 야무져보이는 작은 손도.


오늘은 그때를 생각하며 쌀국수나 한 그릇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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