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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낙타 Jan 11. 2020

내가 기억하는 1990년도

라떼는 말이야 첫 번째 이야기

나는 국민학생으로 학교를 입학하고 초등학생으로 졸업한 세대이다. 그때 즈음인 1990년대 초반에 떠오르는 몇 가지 추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처음으로 내가 살았던 아파트는 지역의 이름을 앞에 붙인 '경주아파트'였다. 얼마나 오래되었으면 지역명을 앞에 붙일 수 있었을까? 지금은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재건축을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외관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는 주변을 둘러보면 논밭만 보일 뿐이었고 최고층이 3층인 다른 아파트 몇 개만 서있을 뿐이었다. 


책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실내화 주머니를 꼭 잡은 채 학교로 향했다. 거리가 상당히 멀어서 걸어가면 40분가량 걸렸지만 지루하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홍색과 흰색으로 섞인 아카시아 꽃을 하나씩 꺾어서 꿀을 쪽쪽 빨아먹거나 논두렁길 사이를 지날 때 잠자리를 잡기도 하고 친구들과 가위바위보로 가방 들어주기를 하며 등하교도 일종의 놀이로 여겼다.


그 논두렁길의 중심에 새로운 국민학교가 생긴다는 소식에 내가 5학년이 될 때 완공이 되면 1년은 가깝고 새로운 학교를 다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뜬금없이 각종 뉴스와 신문에 황량하기 그지없던 논두렁 밑에서 금관이니 무슨 토기 같은 각종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나왔고 학교 준공은 몇 년이나 연기되어 별 수 없이 같은 학교를 다녔다. 


하루에 받은 용돈은 500원이었는데 500원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하루 종일 놀 수 있었는데 오락기를 마구 두드릴 때도 있었고 쫀드기나 꾀돌이, 아폴로 따위를 먹는다거나 뽑기, 구슬, 콩알탄, 폭죽 등 모든 놀잇감이 50원, 100원이었다. 


오락실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하루도 빠짐없이 오락실로 향했는데 당시 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최고의 놀이장소였다. 우선 오락실 앞에는 커다란 네모 모양의 검정 스프링으로 가득 찬 '봉봉'이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지역마다 이것을 부르는 이름이 다양하다)

봉봉은 10분당 100원. 주로 어린이들이 즐겼다. 점프하며 앞으로 한 바퀴 돌면 함성과 함께 봉봉 천재로 불린다. 그리고 유독 여기서는 정전기가 자주 발생한다. 끝부분의 스프링을 만지거나 옆사람을 살짝만 건드려도 '탁탁' 튀는 정전기에 괴로워하면서도 구경하는 사람들은 재미있기만 하다. 

해가 질 때쯤 봉봉을 철수하는데 이때 도와주는 지원자를 받게 된다. 치열한 경쟁 속에 오락실 아저씨에게 선택받은 아이들은 10분을 공짜로 타는 대신 철수할 때 천막과 의자 등을 정리하며 도와준다. 

실컷 봉봉을 타고 내려오면 만화 드래곤볼에서나 보았던 중력의 힘을 받게 된다. 몸이 두배는 무거워지고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 모두들 "윽윽", "아윽", "이얍" 등 각종 기합소리가 터져 나오며 중력을 이기기 위해 몸부림친다. 

테두리도 요즘처럼 덮혀져있지 않고 스프링들이 주르륵 보였었다



봉봉의 옆은 '스카이 콩콩'이라 불리는 낡은 철기구가 10여 개 정도 줄지어 서있다. 몸치라 유독 이 스카이콩콩만큼은 잘 못했는데 발이 땅에 닿지 않고 5번 이상을 튀기지 못했다. 땀이 뻘뻘 나고 힘들면 옆에서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과 번갈아가며 누가 더 많이 땅을 튀기나 싸웠었다. 


오락실 안으로 들어가면 휘황찬란한 각종 게임기가 기다리고 있는데 어린 마음에 무서워서 격투 게임은 도전도 하지 못하고 동네 형들이 하는 것을 구경만 했었다(이후 격투 게임 고수가 되었다..). 그래서 주로 비행기 게임과 아기자기한 그래픽의 게임들을 많이 했었다. 500원으로 기본 3시간 이상은 거뜬히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매일매일 아무 걱정 없이 놀고 행복했다. 


돈이 없어도 즐겁게 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주말은 집 앞 놀이터에 나가면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대부분의 친구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두가 친구였다. 어느 동 몇 호에는 어떤 가족이 무슨 일을 하는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어른들과의 교류와 왕래도 잦았고 정이 참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가 새로 이사라도 오면 떡과 음식을 나누는 것은 다반사였고 심지어 마땅히 먹을 반찬이 없을 때 반찬통을 들고 이곳저곳 반찬을 교환하러 다닌 기억도 있다.


고향에 내려가면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한 지 5년이 지났는데도 어색한 분위기에 적응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가끔 예전 아파트를 일부러 찾아가 주변을 걸어본다. 논밭은 수많은 고층 아파트와 각종 상가들로 대체되었지만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낡고 색 바랜 아파트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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