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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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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몬숲 May 28. 2024

왜 나일까

하필 왜

많이 억울했다. 어떻게 내가 그런 쓰레기를 선택할 수 있지?

어떻게 나를 조종하고 학대하려고 던진 미끼를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내가 느낀 억울함은 멍청한 나 자신을 죽이고 싶을 만큼. 죽음으로 나의 억울함을 증명해 보이고 싶을 만큼이었다.


그 고통을 당하려고 결혼이라는 걸 했다니. 좋은 남자들도 많았는데, 고르고 고른 게 이런 쓰레기라니. 인생이란 참으로 허무하다. 나는 정말 그 사람의 신앙만 보고 결혼했는데. 그 역시도 사기였다니.


6월에 결혼해서 11월 11일부터 별거했다. 빼빼로데이라서 별거날짜를 기억한다.

정확히 말하면 결혼한 지 3개월 2주 만에 별거 후 법적으로까지 남남이 된 건 1년 3개월이 지났다.


아주 지독한 악몽을 꾼 것 같다. 아직 온전한 회복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전과 같이 심장이 쪼여드는 압박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신앙을 갖고 나서 이상한 남자들을 만났다. 신앙을 갖기 전에 만났던 사람들은 성품이나 마음씨나 그래도 꽤 괜찮은 사람들이었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다. 내가 가진 지나치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긍휼 한 마음 때문에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상대방이 여자일 경우에는 그녀가 필요한 것들을 요청했을 때 거절하지 못했고, 남자일 경우에는 연애가 되었다.


내가 끌렸던 남자들은 뭔가 우울해 보이고, 모자란 남자들이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사랑이라 착각했다. 그 사람이 생각나는 건 그저 쓸데없는 정이 든 것인데 계속 생각이 나니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것이다. 나의 헌신에 고마워하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다니 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난다고 하면 꼭 멀쩡하고 괜찮은 남자들이 와서 진짜 좋아해서 사귀는 게 맞냐고 확인을 하러 왔다. 나는 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지 않고 편안해지는 남자에게는 어딘가 불안함을 느꼈었다. 하.......... 진짜 생각 보면 제정신이 아니었네.


이혼하고 나서 오랜만에 친했던 오빠를 만났다. 20대에 나를 정말 잘 챙겨주던 오빠였다.  7년 전이나 지금이나 오빠는 똑같았다. 오빠는 내가 겪은 일들을 듣더니 너는 악 그 자체를 경험했다면서 분노했다. 그리고 나를 볼 때마다 물가에 내놓은 불안한 애 같았다고 했다.


기독교가 개독교라 욕을 먹는 것은 이기적인 기독교인들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할렐루야 하면서도 삶에서는 자신의 이득이면 물불 안 가리는 사람들. 남이야 어떻든 자기만 잘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는 사람들. 결국은 나를 구원받을 사람이기 때문에 타인은 지옥의 땔감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 세상 이기적인 사람이 알고 보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


그래서 나는 그러지 않고 싶었다. 나 역시도 연약한 사람이지만, 그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나 자신을 너무나 희생하면서... 그리고 알아주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는 나를 또 채찍질하면서... 늘 지치고 외롭고 피곤했다. 항상 바쁘지만 공허한 마음. 그 마음이 말씀 읽고 기도하면 또 괜찮아지고,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으니, 나도 그런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 죽기까지 순종하고 싶은 이 마음이 구원자 콤플렉스, 메시아신드롬이 되었다. 저 안 괜찮아요. 한 마디 하면 됐을 텐데.


누군가를 도우며 어린 시절 나의 외로움을 감싸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항상 바빴던 부모님과 이 집 저 집 갈 곳을 잃은 채로 맡겨져야 했던 날들, 마녀 할머니의 괴롭힘. 속옷 사달라고 말하지 못해서 한여름에도 티를 몇 장씩 껴입고 땀을 뻘뻘 흘리고 다녔던 날들, 친했던 사람들에게 겪었던 배신, 육체적 정서적 상처들. 가난하고 슬픈 날들이 많아서. 그래서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더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내가 겪은 많은 상처와 아픔들은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거라니. 그래서 더 계속해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나는 더는 고통을 견딜 힘이 없었다.


자기 영역이 확실한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고, 스스로 주눅이 들기도 했다. 나는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높지가 않은 거였어. 그저 높다고 합리화하고 있었을 뿐. 내가 싫은 거에는 아니요.라고 한 마디 하면 됐을 텐데. 나댄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착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세상에 그런 인간 존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성경에 나오는 악인들은 성경이니까 나오는 거겠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라고 했는데, 나는 정말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했다. 더 하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꼈을 뿐. 그런데 이런 헌신과 사랑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조종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인간이 있다니. 정말 천국과 지옥은 있을 수밖에 없는 거구나. 나르시시스트와 에코이스트. 환장의 궁합이다.


새 인생을 살고 있는 지금에 생각해 보면 이혼은 너무나 큰 아픔이지만 어쩌면 꼭 필요했던 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굳이 경험하지 않았으면 너무나 좋았을 일이고, 정말 위험한 순간들이 많았지만. 이혼이 없었다면 나는 다시 내가 좋아하는 시를 읽지도 않았을 거고, 여행 같은 건 꿈도 못 꿨을 거고, 담임 목사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복종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탓했을 거다. 신앙과 관련되지 않은  책, 노래, 영화, 장소들을 가서 누리는 것들을 죄악시했을 거고 부모와 가족들을 구원해 달라고 금식기도원에 들어가서 20일 40일 금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신다고 생각하면서 경제관념도 없을 거고. 여전히 이중직을 하면서 일주일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고 있었겠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다 떠나서 아마 세상에 없을 거다. 약 먹고 조용히 죽지 못하면, 다른 방법들을 선택했을 거다.


나를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나는 그런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이제 나는 스스로 타인의 예수님이 되지 말아야지.


나는 다시 누군가와 만나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니까. 나는 중년, 노년에 혼자 살 자신 없는데. 이상한 남자를 또 만나면 어쩌지 하는. 그러나 이제는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나에게는 공동체가 있으니까. 도움을 주고받을 거다.


Brand New Day. 나의 소중한 새로운 날들. 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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