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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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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몬숲 Aug 22. 2024

살아남은 의미의 기록들

산 1번지

해가 지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바람이 찾아온다

집집마다 지붕으로 덮은 루핑을 날리고

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

불행한 사람들의 얼굴에

돌모래를 끼어 얹는다.

해가 지면 산 일번지에는

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깔린다.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

서로 속이고 목을 조르고 마침내는

칼을 들고 피를 흘리는데

정거장을 향해 비탈길을 굴러가는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연기가 불어 흐늘댄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기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그리하여 산 일번지에 밤이 오면

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쳐

모든 사람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_신경림, 산 일번지, 1970 창작과 비평



이번 시 모임에서는 신경림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 그의 시집에서는 남성적이고 폭력적이고 술을 많이 마시는 실업한 남자들의 언어가 자주 등장한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글자가 주는 의미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말의 어투나 억양, 사람의 눈빛을 예민하게 관찰한다. 내가 원해서 이런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 이런 글을 시로 썼을까 불편한 마음은 이내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이런 시를 써도 되는구나.

시 모임에서는 일주일 동안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것들을 글로 써서 나눈다. 삶을 글로 쓰면 인생이 낯설어진다. 글쓰기가 가진 치유의 능력의 혜택을 받고 있는 나는 신경림의 시를 읽으면서 나의 좌절된 꿈이 소생되는 것을 느꼈다.

이 시가 저자의 삶과 상황에서 직접 경험하여 쓴 것인지, 누군가의 말을 통해 쓰인 시인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의 시의 재료는 작가가 처한 현실에서 왔다.

나는 아직 나의 상실에 대해서 해결되지 않은 것을 느꼈다.

사람들 앞에 읽히는 시들은 누구나가 보편적으로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글들만 내어 놓는다. 그 깊은 상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안전한 공동체임에도 나는 내 속을 들여다보는 글을 타인 앞에서 읽어 내려가기엔 아직 더 영글어야 함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마음에 있는 상실들을 입 밖으로 꺼내어 해결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끼기도 하였다. 내가 나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는 이 감정의 기제는 무엇인가.

신경림의 언어들을 통해서 나는 그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어떠한 판단과 시선에서도 자유로운 그저 자신일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건 엄청난 자유로움을 가져올 것이다.

이런 것들이 글이 되고 그 글이 누군가에게 읽힐 수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신경림 시인이 부러웠다. 깊은 내면의 상실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인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 오픈해야 할지가 헷갈린다.

내 속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표현적 글쓰기를 주로 하고 있는 나와 같은 경우 공개할 수 있을 만큼의 글을 쓰고 나서는 어딘가 모르게 찜찜함을 느낀다. 뭔가를 속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다. 나를 드러내 보였을 때 그것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은 책을 덮으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그 불쾌감을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다. 나는 타인에게 기쁘고 좋은 에너지를 주고 싶다. 이런 에너지도 내가 가진 게 맞지만 내가 나의 패를 깠을 때 나는 조금 더 나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냥 난 그렇다.

나는 슬픔을 떠나보내기 위해 글을 썼다. 마음이 터질 것 같이 막막할 때 약을 먹고 그 약이 내 몸에 핑 도는 그 시간에 글을 쓰다 보면 미칠듯한 감정들이 누그러지고 내가 써놓은 글들이 제삼자가 되어 내가 무엇을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를 생각나게 한다.

나를 미치게 하는 일들이 사라져 버리면 좋겠지만 그 미쳐버릴 것 같은 충동이 글을 쓰게 하는 폭발력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미칠 것 같은 감정의 충동이 사랑스럽지는 않다. 그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인생의 벗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종종 그 감정들에 이름을 붙여준다. 너 왔니 하고 이젠 좀 가라 한다.

살아남은 의미를 기록한 사람들의 글은 그 자체로 힘이 있다. 심장이 불타 없어지는 것 같은 미칠듯한 고통이 있어도 인생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쓸 때에 마주하는 낯선 나는 현실 속의 실제의 나와 항상 일치되지 않는다. 내 안의 욕구와 원망과 슬픔들이 나를 덮쳐올 때 내가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신의 존재이고, 내 삶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멍하게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기력함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못할 무기력이 오면 머리가 아프기 전에 뇌의 스위치를 끄게 된다. 내 몸이 나를 알아서 머리가 터지기 전에 잠을 재운다. 나는 여전히 건강하게 인지하고 생각의 길을 생명과 가깝게 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하루에도 삶과 죽음이 오가는 생각을 한다.

오늘 집에 오는 길에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비싼 외제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차가 달려오면 나를 치고 갔으면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조심히 건너야지 생각했다. 오늘도 여전히 무기력했는데도 나는 차가 멈추는 것을 보고 나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나는 몇 번이고 더 흔들리겠지만 어쩌겠어.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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