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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ll Dec 31. 2016

오힌더의 꿈을 묻는 소녀

오힌더는 작은 섬마을이다. 아주 작아서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지만 푸른 언덕도 있고 깎아지른 절벽과 길게 뻗은 모래밭이 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오힌더의 언덕에는 항상 바람이 불어온다. 섬은 꽤 멀리 있어서 육지 사람들이 온 적은 없지만 바람은 모든 육지로부터 섬에게로 불어온다. 


오힌더의 절벽과 모래밭에는 항상 파도가 밀려온다. 세상의 모든 바다를 돌고 돌아온 물들이 오힌더의 절벽에 와 부딪히고 오힌더의 모래밭에서 햇살을 만지고 간다. 


그리고 오힌더에는 소녀가 살고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아무도 몰랐다. 아무도 불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는 외롭지 않았다. 소녀는 너무나 바빠서 외로울 틈이 없었다.


화창한 날에는 소녀는 언덕 위에서 바람에 실려온 꿈을 만났다. 어떤 꿈들은 언덕 위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창백하게 빛이 바래 흐느적거렸지만 어떤 꿈들은 언덕으로 내려앉지 않고 다시 날아가버릴 만큼 쌩쌩했다. 어떤 꿈들은 놓친 것이었고 어떤 꿈들은 잊혀진 것이었다. 


흐린 날에는 절벽 아래 동굴에서 꿈을 만났다. 어떤 꿈들은 건져 올리려 하면 흩어져버렸지만 동굴 안이 소란스러워질 만큼 팔팔한 꿈들도 있었다. 어떤 꿈들은 잃어버린 것이었고 어떤 꿈들은 버려진 것이었다.


날이 개면 소녀는 바닷가 모래밭에 떠밀려온 꿈을 만났다. 대부분의 꿈들은 많이 지쳐 있었지만 가끔은 아직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꿈들도 있었다.


소녀는 꿈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늙은 의사가 오랫동안 간직해 온 꿈은 셋째 아들이 낳은 손녀를 안는 순간 버려졌다. 의사는 열기구를 타고 여행을 하기에는 스스로가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막내 손주는 첫 손주보다 더 어여뻤고 이만하면 행복은 충분하지 않은가 싶었다. 꿈은 아주 오랫동안 의사와 함께했지만 별로 크고 강하진 못했다. 언덕 위에 내려앉는 순간 꿈은 짧게 이야기를 마치고 소녀의 품 안에서 사라졌다.


커다란 곰 인형이 가지고 싶다는 꿈은 놀라울 만큼 생생해서 아직도 곰 인형의 리본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다섯 살 줄리는 금세 열다섯 살이 되었고 곰 인형을 좋아하는 것이 남자 친구와 키스하는 데에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줄리는 열쇠가 달린 일기장의 맨 뒷장에서 '커다란 곰 인형'이라는 항목에 굵은 볼펜을 두 줄 그음으로써 정식으로 꿈과 작별했다. 소녀는 꿈이 도무지 지치질 않아 애를 먹긴 했지만 언덕 아래 벌판까지 잘 이끌어 왔다. 그리고 커다란 미루나무 옆 세이지 덤불 옆에 꿈을 묻어주었다. 


소녀는 모래밭에 쓰러진 채 엄마를 그리워하는 꿈을 만났다. 더 이상 엄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데다가 엄마도 이제는 그녀를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한다. 아주 흐려졌는데도 꿈은 사라질 수 없었다. 소녀는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개울가 모퉁이에 꿈을 묻기로 했다. 볕은 많이 들지 않지만 땅이 아주 단단해서 좋은 향기가 나는 곳이었다.


땅에 묻힌 꿈들은 더는 떠돌지 않는다. 그리고 천천히 가끔은 의외로 빠르게 사라졌다. 드물게 꿈의 주인이 죽고 나서도 떠도는 꿈도 있었다. 다시 누군가의 꿈이 되기 위해 되돌아가는 꿈도 있었다. 그래서 소녀는 신중하게 꿈을 묻었다.


때로는 한참을 오힌더에 머무르는 꿈도 있었다. 소녀는 매일 아침 오늘은 그 꿈을 묻겠어, 라고 결심했지만 자꾸만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통에 도무지 묻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아침 꿈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버렸다. 


다시 돌아오는 꿈도 있었다. 처음 왔을 때 묻어줄 걸,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미 초라해진 꿈을 어쩔 도리는 없었다. 돌아온 꿈은 바삭하게 사그라져 버렸다.


오힌더의 가장 큰 나무 아래에는 아직 한 번도 꿈이 묻히지 않은 자리가 있었다. 소녀는 나무 주위에 패랭이꽃을 심어주었다. 피고 지면 다시 심고 피고 지면 다시 심어서 언제라도 그 자리에 꿈을 묻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어쩌다 조금 한가한 날이면 나무 아래 앉아 꿈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자리에 묻힐 꿈은 오지 않았다.


소녀는 많은 꿈들을 만났다. 온 세상을 모두 여행해 본 것 같았다. 모든 꿈을 다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큰 나무 아래 패랭이꽃 옆에 묻힐 꿈은 무엇일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해가 저물고 새로운 날이 오면 소녀는 너무나 바빠서 외로울 틈도 없이 꿈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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