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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근 May 08. 2019

돈 없이는 발전도 없다

돈은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세계사를 보면 돈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역사를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에 대해 왜곡된 지식을 종종 갖게 된다. 역사를 배울 때 시대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인물을 부각하거나, 역사를 크게 바꾼 사건에 집중하여 배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의 발전은 반드시 어떤 형태의 자본을 필요로 했다. 예를 들어 농경시대로 들어서면서 잉여생산물이 생겼고, 남은 곡식 덕분에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전문성이 생기고 발전하게 되어 나라가 형성될 수 있었다. 세계를 크게 뒤흔든 산업혁명도 르네상스 시절부터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누적되어 특정 임계점을 기준으로 급격히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사과나무 밑에서 중력을 발견한 뉴턴처럼 위대한 발견을 할 순 있을지언정(물론 이런 것도 지식의 축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 자체로 당장 세계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후 충분히 실생활에 쓰일 수 있을 만큼 연구가 되고 활용도를 높여야만 비로소 역사를 바꿀만한 사건으로 변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의 내용 없이 원인과 결과만 늘여놓기 때문에 역사에 흥미를 갖는 것도, 역사를 다각적으로 보는 것도 힘든 것이다.


돈은 역사 속 결정적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알려진 역사적 사건의 겉모습을 익숙하지 않은 경제적 관점으로 속살까지 살펴보려 한다.



# 19세기 해전, 얼마큼의 돈이 필요했을까?


19세기, 전 세계 패권국가인 영국과 프랑스가 충돌했다. 유럽은 워낙 옹기종기 붙어있던 터라 전쟁이 잦은 편이기도 했는데 19세기는 프랑스의 영웅인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더욱 치열하게 전투가 진행되었다.


그중 1805년 10월 21일 영국 해군과 프랑스 & 스페인 연합 함대가 전투를 벌인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는 넬슨 제독이 프랑스 & 스페인 연합함대를 완벽하게 쳐부수게 된다. 전쟁을 이겼네, 졌네로 만 보기에는 먼가 찝찝한 구석이 있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풍부한 노동력과 자원이 있었다. 해군에 투자할 수 있는 자금도 영국보단 프랑스가 훨씬 유리했을 터다. 그런데 영국은 어떻게 이기게 된 걸까?


당시 해전은 '전열함'이라 불리는 배를 일렬로 세워 상대를 향해 포격을 가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100채 이상의 주철로 된 대포를 2~3층에 걸쳐 설치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고, 심지어 포가 발포되는 화력에 의해 배가 밀려나기까지 했다. 그 외 수면에 닿아있는 포문을 열기 위한 방수처리라든가 무거운 포를 설치하면서 무게중심을 잡아야 하는 등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최첨단 기술이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선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다.


당시 넬슨 제독이 탑승하고 있던 기함 HMS 빅토리 호는 104문의 대표를 장착하고 있었다. (...) 소나무만 6천 그루가 필요했고, 그에 따른 비용이 약 6만 3천 파운드에 이르렀다. 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10억 원이 넘는다. 게다가 이는 오로지 건조 비용에 해당하는 것일 뿐, 대포의 생산 및 병사들의 인건비 등은 포함되지 않은 금액이다. -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중



# 국가신용이 기술발전에 미친 영향


배 한 척에 110억은 경악케 할 수치이다. 이런 엄청난 돈을 영국은 어떻게 조달할 수 있었을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더글러스 노스와 배리 와인개스트는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에 주목했다. 명예혁명을 기점으로 영국의 국채금리가 급격히 하락해 자금을 융통하는데 타 나라에 비해 우위를 가져올 수 있었던 샘이다.


영국 금리는 17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10% 혹은 15% 이상의 수준이었다. 영국 금리가 이토록 높았던 건 이자 및 원금의 지급이 빈번하게 정지되어 '위험 프리미엄'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예혁명 이후 영국 금리는 크게 떨어졌으며, 1980년을 전후해 세계적인 인플레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10% 이상 수준으로 다시는 올라가지 않았다. -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중


영국은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이용해 다양한 분야에 투자할 수 있었다. 넘치는 돈으로 단순히 기술력만 우위를 점하는 것뿐 아니라 실제 화약을 이용해 실전에 가까운 훈련도 가능하게 했다. 다른 나라는 전쟁이 시작된 후에야 실전에 가까운 훈련이 가능했던 점을 보아 이는 매우 유리한 고점을 차지한 샘이다.



# 비싼 돈은 투자를 망설이게 한다


나라가 불안하면 금리가 높아진다. 신흥국의 경우 대부분 이자가 두 자리 수인 것도 그런 이유다. 비싼 이자는 투자를 망설게 하는데, 이자를 갚기 위해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돌아오는 게 적다면 대부분 노력을 하는 것보다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것을 택할 것이다. 고금리는 단순히 이자가 높아지는 것뿐 아니라 투자심리를 악화시킨다.


회사는 투자를 해야 한다. 갓 생성된 회사는 캐시카우를 만들기 위해 투자를 해야 하고, 이미 잘 나가고 있는 회사는 다음 먹거리를 찾아 연구를 해야 한다. 이 모든 활동에는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금을 어떻게 융통할 것인지는 생각 이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자가 비싸면 돈을 빌리는 것도, 연구비로 돌리는 것도 힘들다. 그렇다면 1960~1990년 대의 한국은 어떻게 산업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한때 높은 금리를 보였던 1970년대 한국의 경우 사채이자가 40~60%인데 반해 기업이 대출해가는 이자는 6%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한국 GDP의 30%를 차지하는 농업기반의 산업은 지리적 요건으로 한계가 명확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수출주도형 성장을 목표로 잡고 기업에 전폭 지원해준다. 규제는 느슨하게 하고, 자금은 저금리로 융통해주어 기업에게 다방면으로 힘을 실어준 것이다.


수출주도 성장을 위해 중공업으로 목표를 잡았지만 당시 아무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중공업은 많은 돈, 시간, 높은 기술을 요구하는 산업이다. 당시 한국이 중공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당시 부모세대의 피땀 어린 노력과 희생도 있었지만 정부지원,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한 막대한 물류이동, 동아시아의 무역흐름 덕택도 있다. 만약 이 중 하나라도 맞지 않았다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지금 형태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전 세계에 한국과 같은 케이스가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개발도상국에서 충분한 투자와 노력을 기울여도 굉장히 복잡한 요소들이 운이 좋게 딱 맞아야 높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력이라는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한다. GDP라는 편차가 심한 수치를 아직까지도 사용하는 이유는, 경제가 결국 나라의 부강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객관적 지표이기 때문이다. 열정이라든가, 성실성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직접적이고 가시적이기에 아직까지 경제를 측정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는 다른 어떤 역사 책보다 수치로 표현이 잘 되어 있다. 전열함이 하나 만들어지는데 드는 비용이라든가, 영국의 금리가 세기별로 어떻게 변했는지 등 꽤나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덕분에 인과관계가 다소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편이고, 이전 역사책들에 비해 어떤 권위 있는 인물의 결정으로 인한 파생효과보다 환경적인 면을 연구했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책이다. 


실제로 역사는 하나의 인물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매우 복합적인 관계로 인해 움직인다. 이 책은 사건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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