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도

by 탕헤르의 달

여름의 무더위가 끝날 무렵이면 일본 전역에는 태풍이 찾아온다.


작년 8월 말에도 태풍 10호가 일본의 남쪽 지역을 거쳐 돌풍과 폭우를 몰고 교토를 지나갈 예정이었다. 일본 정부에서 '난카이 트로프 지진 임시 정보'를 발령했다 해제한 것이 8월 15일이었으니, 한 달 사이 두 번이나 자연재해의 불안을 느껴야 했다.


단전과 단수를 대비해 물과 통조림 등 비상식량과 가스버너, 보조배터리, 라디오, 손전등 등이 구비된 비상가방을 항시 준비해 두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피난 상황이 발생하면 필요한 것은 이보다 훨씬 많겠지만 일단 물과 빵이라도 사두기 위해 집 앞 슈퍼를 찾았다. 그러나 물과 빵은 이미 동이 난 상태였다. 간신히 한 블록 떨어진 슈퍼에서 물 두병과 빵, 통조림 몇 개를 살 수 있었다.


소란했던 태풍 10호는 다행히 교토에 오기 전에 소멸했지만, 9월 내내 다른 지역에서는 홍수, 산사태 등 피해 소식이 그치질 않았다. 재해의 빈도와 규모가 한국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어 온 지진, 태풍, 화산은 인간의 시간과 노력을 무력하게 만든다. 공포와 절망과 눈물이 그리고 분노가 차 오를 것 같다. 그래도 삶을 이어가야 한다면 이러한 감정은 유해할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는 곳에서 신은 가깝고 밀접하다. 절망과 분노를 비우고 염원과 감사를 말한다.


교토에만 약 1,600개의 사찰과 약 400개의 신사가 있다. 카페만큼 많이 보이는 곳이 사찰과 신사다. 사찰이 많지만 일본에서의 불교는 종교적 기능보다는 장례와 제례를 주관하는 '의례'로서의 기능이 크다.


일본에서 신들은 사찰이나 교회보다 '신사(神社)'에 머문다. 신사는 일본 고유의 종교 '신토(神道)'의 신들을 모시는 장소이다. 신토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일종의 애니미즘적 믿음이다. 이는 종교 이전의 어떤 정신적 원형에 가깝다.


천둥이나 번개가 과학의 영역으로 온 것은 역사가 길지 않다. 하늘과 땅의 움직임은 오랫동안 신의 노여움이었다. 신을 노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인간은 항시 스스로를 돌아보며 언행을 조심해야 했다. 감정 표현을 자제했고 조용히 안녕을 빌며, 현재의 무사함에 감사했다.


교토의 골목을 조금만 걸어도 작고 소박한 신사를 만나게 된다. 교복을 입은 채로 붉은 문을 통과해 '딱딱' 손뼉을 두 번 치며 합장하는 모습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한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 인연을 기다리는 젊은 남녀, 가족의 건강을 바라는 모든 이들이 산책길에 출근길에 신사를 찾는다. 일상의 희로애락이 신사에 담긴다. 합장한 손은 조용하고 공손하다.


신록이 눈부시게 푸르다. 매년 이맘때면 부처님이 오신다. 신록 사이에 매달린 빨갛고 노랗고 하얀 한국의 연등이 그립다. 오색이 청명하고 아름답다.


만물에 깃든 신은 절제하고 감사하는 몸가짐을 만든다.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염원한다. 신록과 눈의 계절, 1년에 두 번만 신을 찾을 수 있는 평온을.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도를. <202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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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이나 신사에 걸어두는 소원액자 ‘에마’> <동네 곳곳에 위치한 작은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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