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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May 16. 2021

안 쓰니까 구독자가 늘었다

지금은 열일중

섬에 온 후 죽어라 일만 했다. 스무 해 전 악몽같았던 호주 워킹홀리데이가 오버랩 될 정도였다. 돈이 없긴 했지만 이래야 할 정돈 아닌데, 이상하게 일에 목맸다. 왜였을까. 나이는 마흔을 지났음에도 무엇 하나 이룬 게 없다. 그건 둘째치고라도 무엇을 해야 할지, 하고 싶은 게 무언지도 알 수 없다. 그런 막막한 상황이 만들어 내는 막연한 불안감, 초초함 따위를 망각하기 위한 몸부림 내지는 자학일까, 아마도.


아무튼 그러느라 한동안 글도 한 줄 못 썼다. 십수 년 습관처럼 끼적이던 일기는 물론, 관종욕구를 채우기 위해 깨작였던 SNS도 접었다. 오래 마음을 두었던 대상과 결별하면 한동안은 심란할 줄 알았다. 근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고 홀가분했다. 어떤 이는 행복하려고, 또다른 이는 스스로를 치유하려고 글을 쓴다는데, 나는 쓰지 않으니까 외려 행복했고, 없는 병도 낫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친구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글쓰기는 애초에 너의 길이 아니었나보다는 진솔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이 아프면서도 시원했다.


브런치에도 오래도록 들르지 않았다. 가끔 들러 지난 글들을 읽으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난 날의 내 철없고 못난 행동들처럼 부끄러웠다. 그래서 더 뜸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글 한 줄 쓰지 않는데 한 명 한 명 구독자가 늘었던 것. 열심히 쓸 때는 여간해선 늘지 않았는데, 안 쓰니까 누군가 나를 구독했다. 그렇게 구독 알림을 받을 때마다 가만히 있어야 지지율이 오른다는 어느 야당의 구전설화가 떠올랐다. 웃펐다. 웃프다에서 방점은 '프'.


앞으로도 한동안은 무엇도 끼적이지 못할 듯하다. 바쁘기도 하고, 위에 말했듯 안 쓰니까 편하고 행복하고 좋아서다. 꼭 써야 한다는 지긋지긋한 강박이나 '잘' 써야 한다는 압박과도 이제 그만 작별하고 싶다. 어차피 글로 먹고 살 팔자는 못 되고, 능력은 더욱 안 되고. 그럼에도 지금까지 쭈욱 뭔가를 끼적여 왔던 건, 정말 글이 미치도록 좋아서라기보다, 이거라도 없으면 벌거벗은 듯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은 스스로를 견딜 수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이제껏 연필은 참, 무거웠다. 어쩌다 그 무거운 연필을 내려 놓으니, 달 표면을 걷는 우주인이라도 된 듯하다. 가볍다.


그래도 내 지난 글들을 어찌 찾아와 읽고 구독 버튼까지 눌러준 몇몇 분들의 작지만 큰 수고로움이 있어 "글을 안 쓰니 독자가 늘었다"는 글 한 편을 오랜만에 짜내보았다. (물론 이전부터 부족한 나를, 내 글을 넘치게 아껴준 마음 마음들이 바탕이며 여백임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으리라(면서 언급함)). 또 한동안은 사느라 바빠서 글을 못 쓸 텐데... 그러면 또 구독자가 늘겠지.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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