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나 Jun 03. 2019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반디푸르, 네팔, 2015.12.

시간은 밉상이다. 아프고 슬플 땐 한 시간이 하루인 듯 흐르고, 기쁘고 행복할 땐  한 시간이 일 분인 듯 흐른다.


생경한 천안으로 인생 첫 취업을 나갔던 열아홉 겨울을 기억한다. 몹시 추웠고, 이틀이 멀다 하고 폭설이 내렸다. 함께 취업 나온 친구 셋과 방을 얻은 첫 주말, 친구들은 주말을 나기 위해 모두 집에 가버리고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일요일 아침, 내 주머니에는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전부였다. 그 주에 쓸 용돈을 피시방과 오락실에서 스타크래프트와 PUMP를 하는 데 탕진한 탓이었다. 저녁에 친구들이 돌아올 때까지 천 원으로 하루를 버티는 것. 그것이 그날 나에게 주어진 생존 과제였다.


이른 아침 눈뜨자마자 윗배는 눈치도 없이 요란하게 배고픔을 알렸다. 전날부터 먹은 게 없어 별로 없어 기진맥진했다. 나는 마치 좀비처럼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밤새 내린 폭설에 얼음 왕국처럼 새하얀 세계.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 황홀한 설경을 눈에 담고 감탄하기에 내 뱃속은 너무나 황량했다. 다만 혹한에 몸서리치며 추리랑 주머니 속 곱은 손에 천 원 지폐 한 장을 쥐고 종종걸음으로 동네 슈퍼에 갔다. 천 원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다. 선택지는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각각 오백 원짜리 빵과 우유 천 원어치를 사느냐. 아니면 소 없이 크기만 한 천 원짜리 빵 하나를 사느냐. 전자를 택하면 우유의 부드러움에 빵의 뻑뻑한 식감은 사르르 녹아들고 빵의 설탕과 우유의 유당이 하나의 달달함으로 화하는 풍미를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전자를 선택한 결과 황홀한 순간은 찰나에 지나가고, 저녁이 되어 친구들이 돌아올 때까지 강제 단식에 들어야 한다. 후자를 택하면 큰 빵을 균등하게 삼등분으로 나눔으로써 현명하게 삼시 세끼를 해결할 수는 있을 테지만, 침으로는 쉽게 녹일 수 없는 빵의 뻑뻑함이 식도에서 위장까지 이르는 길에, 명절 전국 고속도로 정체에 맞먹는 체증을 유발할 터였다. 빵과 우유라는 완벽한 조합의 한 끼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삼시세끼를 보장하지만 뻑뻑하고 맛없어 보이는 빵 하나를 취할 것인가. 나는 그때 나 자신이 내 인생의 꽤나 중요한 기로에 서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단순히 '빵의 문제'가 아니었다. '삶의 문제'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짧고 굵게 살 것인가. 가늘고 길게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결국 후자를 택했다. 한 순간의 욕망과 쾌락에 내 전 재산을 탕진하기엔 나는 너무나 쫄보였다. 대빵 만한 빵 하나를 가슴에 품고 몸서리칠 정도로 추운 골목을 쏜살같이 달려 자취방에 돌아왔다. 온기 없는 방바닥에 언 몸을 누이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야금야금 아껴가며 빵을 뜯어먹었다. 3분의 1만 먹고 비닐봉지를 잘 닫아서 손이 닿지 않는 방구석으로 밀었다. 손이 닿으면 점심에 먹어야 할 3분의 2까지 먹어버릴 것 같았다. 그만큼 배가 고팠다. 머리까지 뒤집어쓴 홑이불 너머로 불투명한 공간에서 시간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갔다. 이 하루가 과연 끝나긴 할까,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여는 감격의 순간은 정말 오긴 할까, 그런 생각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도 없이 맴돌았다. 맴돌고 맴돌아, 이제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갔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불을 내리고 벽시계를 보면 채 오분 도 지나지 않았다. 이 무슨 '정신과 시간의 방'*이란 말인가. 가없이 느린 시간의 고문 속에서 나는 부모님이 아껴 쓰라며 주신 용돈을 스타크래프트와 PUMP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한 방에 탕진해버린 스스로의 한심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은 어쨌든 흐른다. 흐르는 것. 그것이 시간의 유일한 의무이자 권리이다. 시간은 그렇게 모든 존재와 사물을 공평하게 관통하여 만물의 모든 무덤까지 균등하게 흐른다. 배고픔과 무료함에 신음하던 그날도 결국 저물었으며, 저녁 늦게 친구들이 방문을 활짝 열며 내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은 기어이 도래했다. 집에서 가져온 취사도구에 안성탕면(당시엔 안성탕면이 으뜸이었다)을 사 와 나를 위해 라면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날 밤의 라면은 내 전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맛있는 라면이었다. 마법사의 묘약을 완성하는 정체불명의 액체 한 방울처럼 다른 라면엔 없는 첨가된 적 없는 농밀한 눈물 덕분이리라.


열아홉 겨울의 그날은 내 삶에서 시간이 작정하고 악랄하게 늘어졌던 구간이었다. 그리고 서른다섯 살, 뜻밖의, 원하지 않는, 내 여행 사전에 존재한 적 없는 그 단어, "동행"과 함께한 시간도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한없이 느리게 흘렀다. 바라나시에서 그를 만났다. 정년퇴직하고 꿈에 그리던 첫 해외여행, 환상을 품었던 인도. 하지만 인도는 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사기를 당했고, 바라나시에 오는 기차에서는 장대치기에 핸드폰까지 잃었다. 그렇게 그는 한갑의 나이에 머나먼 이국 땅에서 고국의 가족과 어떤 연락도 취할 수 없는 천애고아가 된 채로 내가 묶고 있는 숙소까지 흘러들어온 거였다. 폐쇄적인 성격 탓에 이제껏 누군가와 함께 여행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 여행은 내게 절박했다. 그런 이유로 그를 모른 척하고 내 여행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러질 못했다. 그를 외면하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든 내 여행이 방해받는 걸 견디지도 못할 거면서, 그의 여행을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테라스에 세상 절망한 얼굴로 앉아 있는 그를 보니, 결국 그의 여행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메신저를 통해 가족과 연결시켜주었고, 일정을 조율해서 함께 국경을 넘어 네팔에 가기로 했다. 나는 인도 비자 갱신을 위하여. 그는 이번 여행의 목표 중 하나였던 히말라야 트랙킹을 위하여.


동행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통편 수배부터 숙소 예약, 오늘 할 일, 심지어 그날의 메뉴 선정까지, 현지 정보도, 여행 경험과 기술도 없는 그를 24시간 밀착 마크하는 일은 내게 물리적인 과로였고 정신적인 고문이었다. 그와 나의 관계는 처음부터 수평적이지 않았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문제는 불균형이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는 데 있다. 그는 점점 나를 의존했고, 나는 점점 그가 부담됐다. 나는 그와의 동행이 고달팠고, 동행에서 어떤 즐거움도 찾지 못하고 괴로워만 하는 스스로가 측은했다. 혼자서 뼛속까지 자유로웠던 얼마 전이 그리웠고, 내 귀중한 시간을 손해보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그에게 싹싹하게 굴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졌다. 그러던 어느 오후였다, 허름한 현지 식당에서 그는 말했다. "우리가 동행한 시간이 벌써 보름이네."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체감상 한 달은 족히 넘은 것 같았서였다. 그와 나의 시간은 이렇게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가 말한 '벌써' 보름 동안 나는 얼마나 자주 못나고 지질했던가. 나는 그 면면 들을 감추고만 싶다. 그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고만 싶다. 하지만 그런 못난 면모들 또한 어쩔 수 없는 나의 이면일 것이다. 다만 지금껏 적나라하게 드러날 기회가 없어서 스스로도 몰랐을 뿐. 혹은 은연중에 알면서도 아닌 척, 모르는 척 시침을 떼고 있었거나.


시간은 정말 밉상이다. 스타크래프트나 PUMP를 할 땐 한 시간이 일초처럼 휘발하고, 배고프거나 우울할 땐 하루가 일 년처럼 더디다. 그러나 어쨌든 시간은 멈춤 없다. 영원하길 바라는 행복한 순간도, 훌쩍 건너뛰고 싶은 불행한 순간도 시간은 개인의 체감 시차에 상관없이 표준 속력으로 공평하게 흐른다. 그리고 한 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시간의 엄정한 원칙이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간의 엄정함이 밉살스러운 시간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맥락이고,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일에 대하여 결국 시간에 기댈 수밖에 없는 까닭이며, 모든 것까진 아니지만 꽤 많은 것들을 결국 시간이 해결하는 이유다.


오늘부터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해방의 순간이다. 하지만 왠일인지 예상했던 감격이 없다. 뭔가 모를 아쉬움, 동행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후회와 미안함, 이것밖에 안 되는 나 자신에 대한 익숙한 실망,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지 틀렸다는 예감, 그러나 어쨌든 지나간 이제는 아무것도 되돌리 수 없다는 무력감 들로 착잡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 자기 환멸의 시간마저도 또한 지나가리라는 듯, 그를 태운 카트만두행 버스가 시야에서 멀어지다가 작아지다가 사라졌다.


*정신과 시간의 방 : 드래곤볼에 등장하는 신의 궁전에 있는 수련의 방으로 그 안에서의 6시간은 대략 바깥에 일 분에 해당한다. (출처 : 나무위키)

매거진의 이전글 안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