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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나 Apr 04. 2023

둘째는 빌런? [1]

다 숨었나? / 밟지 마시오

엄마가 저녁준비를 한창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맨날 밖에서 친구들하고만 놀던 작은언니가 나랑 숨바꼭질을 하잔다. 내가 먼저 숨어야 한다. 언니는 대문 근처벽에 손을 포개고 이마를 대고 눈을 감고 열을 센다. 나는 언니가 놀아줘서 너무 신이 났다. 잘 숨어서 못 찾게 해 주어야지. 그 시절 나한테 언니들은 못하는 게 없고 모르는 게 없는 존재였기에 정말 잘 숨어야 했다. 들키지 않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부엌. 밖에서 잘 안 보이는 구석에 교묘히 숨어 있겠다는 작전이었다.


언니가 열을 다 세고 물어본다. “다 숨었나?” 내가 대답한다 “응~!!”


옆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엄마가 황당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언니가 니 여기 숨은 거 다 알았겠다. 대답을 하면 우짜노?” “아하~”하는 순간 언니가 와서 나를 발견한다.


그래서 여태까지 언니는 숨바꼭질에서 언제나, 반드시, 그리도 빨리 나를 찾아냈었구나. 나는 어리바리한 동생이었다. 언니의 술수에 언제라도 넘어가는.


그런 식으로 동생을 놀려먹는 언니가 대단해 보기만 했던, 우리 모두 유쾌한 해 질 녘이었다.






지금은 흔하디 흔한 바나나이지만 70~80년대에는 결코 쉽게 맛볼 수 없는 과일이었다. 그 귀한 과일을 아빠가 사 오시는 날, 속의 하얀 알맹이를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분명히 있었는데 없어지는 신기함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남은 노란 껍질을 바라보는 아쉬움이란,,


그날도 남은 노란 바나나껍질을 바라보던 작은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언니가 궁금한 얼굴로 했다.

"TV 코미디 프로를 보면 바나나껍질 밟으면서 미끄러져 넘어지잖아. 진짜로 그럴까?"

 당시 TV 코미디 방송에서는 슬랩스틱이 주류였다. 과하게 넘어지고 몸으로 웃기는 개그가 대세였던 시절이었다. 멀쩡히 지나가던 사람이 누군가가 땅에 버린 바나나 껍질을 밟고서 뒤로 꽈당 넘어지는  보고  그렇게 웃음이 났던지,, 지금은 이해불가의 웃음포인트다.


우리는 마루 한가운데에 바나나 껍질을 이쁘게 엎어서 둔다. 언니는 나에게 TV 코미디언들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 멀리 보면서 걷다가 바나나를 밟아보라고 한다. 지금이라면, 아니 왜 내가 해야 하냐며 언니가 먼저 해보라고 할 테지만 그때는 "음,, 진짜 될까?" 라며 궁금함이 먼저다. 그리고 마루 구석으로 가서 바나나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시선은 반드시 멀리, 아무것도 모른 척해야 한다. 긴장된다. 두근두근.


밟는 순간 '미끌'하며 균형을 잃는다. 하지만 코미디언들처럼 '꽈당'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너무 웃겨서 까르르 넘어간다. 배꼽을 잡고 웃던 작은 언니는 나에게 다시 주문을 한다. "좀 더 빨리 걸어봐." 난 언니 작품 속 배우처럼 시키는 대로 다시 걷는다. 허둥지둥 걷다 보면 내발은 바나나를 밟고 있다.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꽈당이다! 뒤로 우당탕탕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너무 아프다. 하지만 너무 웃기다. 까르르까르르. 둘 다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그렇게 두세번은 더 넘어지는 연기를 한다. 배가 아프도록 웃고 나서야 정신이 든다. "언니도 해봐." 언니는 망설이는 눈치다. 내 기억에, 언니는 뭐 대충 걷다가 살짝 넘어지는 시늉은 했던 것 같다.


우리들의 코미디도 잠시, 바나나 얼룩으로 마룻바닥이 엉망이  것을 엄마가 알기 전에 바닥을 정신없이 닦아야 했다. 언니가 재미없게 넘어져서 아쉽고 엉덩이는 너무 아팠지만,  모자란 듯한  동생에게 그날은 바나나껍질은 절대 밟으면  된다는 교훈을 얻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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