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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선 Oct 27. 2020

장충단 공원

충과 춘 사이, 낮은 목소리


어떤 장소를 새롭게 인식하게 될 때는 연약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다. 꺼질 듯 안타까운 목소리들이 나를 그 장소에 세운다. 김숨 소설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장충단공원이라는 장소가 뇌리에 훅 들어왔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소설을 집필하면서 시대가 강요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여성들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록도 김숨의 손을 거쳤다. 증언은 활자로 적히고 다시 소설이 되어 우리에게 읽히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는 할머니의 목소리이면서 소설가의 목소리가 겹쳐져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김숨 작가는 그들의 삶이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대와 국경을 넘어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래야한다고. 


순종황제가 남긴 어필.



싸늘한 계절에 김숨 작가와 만난 자리에서 소설과 장소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그 할머니들이 어떤 방식으로 고국으로 돌아오셨는가를 물었다. 송환선이었을까? 기차를 탔을까? 산 넘고 물 건너 두 다리로 걸어서 돌아왔을까? 소설가는 이런 이야길 들려주었다. 


     “길원옥 할머니는 배를 타고 인천으로 오셨는데, 군용트럭에 실려 도착한 곳이  

      장충단공원이었다고 하셨어요.” 








왜 장충단 공원이었을까? 


의문을 풀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장충단 공원에 일본 병영이 있었으며 미군정 하에서 전재민(戰災民) 수용소가 세워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전재민은 전쟁 난민을 뜻하는 말이지만 해방공간에서는 징용 징병 등 갖가지 이유로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온 수많은 귀환자들, 북한 체제에서 견딜 수 없어 남하한 월남인들을 이렇게 불렀다. 귀환자들의 수는 이백만 명, 월남인들의 숫자도 팔십만을 넘는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이 고향으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물도록 수용소를 열었는데, 대부분은 고향을 떠나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장기 체류자들이 많았다. 길원옥 할머니를 태운 군용트럭은 전재민 수용소로 향했던 것이다. 


장충단은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때 죽음을 맞은 장졸들에 제향하는 현충원과 같은 곳이었다. 봄가을에 제사를 모셨던 장충단이 일제강점기에는 야유회와 운동회를 즐기는 공원으로 바뀌었다. 1932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가 세워지자 장충단의 의미는 완전히 전복되고 만다. 광복 후에 독립 운동가를 추모하는 국립공원으로 만들자고 결의했지만, 밀려든 전재민 구호가 시급했기에 수용소가 설치되고 한국전쟁까지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 때는 정치 집회하러 장충단공원에 모였다고 한다. 요즘 시청광장이나 광화문 광장의 역할을 그곳이 했던 모양이다. 


박문사의 기록사진. http://www.ddanzi.com/ddanziNews/597616830 에서 가져옴.




겨울의 끝자락에 걸친 어느 오후에 장충단 공원에 갔다. 일제 때 사라졌다 다시 찾았다는 장충단비가 공원 초입에 있었다. 순종이 황태자 시설 썼다는 글씨 서체가 인상적이었다. 청계천을 복개하던 1957년에 옮겨온 수표교는 원래 이곳이 제자리인 듯 자연스럽게 물길 위에 있었고, 경로당 1층에 장충단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생겼다. 어르신들을 위한 게이트볼장은 여전히 성황이었다. 산책을 나온 사람들,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들, 오며가며 만나 담소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공원을 점유했다. 독립운동가들의 동상 몇 개와 기념비도 있었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집중적으로 세워진 애국애족의 표상들이지만 드러나지 않게 나무들 뒤로 모셔졌다. 시대에 따라 기념의 방식들도 달라져서, 요즘은 ‘남산기억로’나 ‘장충단 호국의 길’처럼 직접 걸으며 문화루트를 체험한다. 






사실, '충'과 '춘'을 구분못했다. 흘러간 유행가에 언급되는 이 지명은 봄날의 꽃이 연상되었던 까닭이고 봄날 찾아가면 더 아름다운 곳같았기 때문에 장춘단이라고만 막연히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충'은 강한 힘이 들어간 글자다. 잃어버린 적 없으나 기이하게 와전된 이름을 명확하게 하는 것도 이 장소에 어울리는 자리는 마련하는 길이 아닐까?


그래도 공원은 공원이었다. 새싹의 움직임이 보이는 듯했다. 자연은 힘이 세다. 거창한 이념의 산물들이 하지 못하는 위로를 불쑥 솟아난 붉은 꽃이, 푸르게 번지는 풀잎들이 기꺼이 해준다. 부유하는 유산만 같던 동상도 오래 그 자리를 지키다보니 맥락 없이 뒤섞였다는 불편함보다 이것도 도시의 풍경이 되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전시관에도 문화루트에도 해방공간의 수용소에 대한 기록은 담기지 않았다. 그곳은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 장소이고 역사였다. 할머니가 밟았던 물컹한 땅은 지금에 와서 단단해졌을까? 이 시대가, 삶이 우리 어깨를 무겁게 누르더라도 무릎이 꺾이지 않고 걸어갈 수 있도록 기억의 장소들이 우리를 지탱해주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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