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 홀저는 2000년 이후로 작품에 들어갈 텍스트를 직접 쓰지 않는다. 텍스트 아티스트이자 개념예술가로 함께 거론되는 바버라 크루거가 –비록 포에버에서 버지니아 울프와 조지 오웰의 텍스트를 활용하긴 했지만 - 여전히 자신이 쓴 글로 작품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홀저는 사건의 진술과 강렬한 시들로 텍스트 박스를 채운다. 진술은 사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시 역시 진술의 다른 형태라면, 제니 홀저가 선택한 텍스트는 직접적인 문제의식을 발현하며 그 자체로 진실성을 획득한 것이다.
제니 홀저는 다양한 방식으로 텍스트를 활용해온 아티스트다. 빽빽하게 적힌 포스터(선동적인 에세이, Inflammatory Essays )와 전광판에 적힌 경구들 시리즈(Truisms)로 70,80년대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표현했고, 대리석과 명패에 글을 새기고 검은 바탕의 흔색 볼드체의 텍스트를 투사하며(Xenon) 작품에 새로운 맥락을 만들었다. 그러나 텍스트 아티스트가 텍스트를 쓰지 않고 진술들로 작가의 목소리를 대신하면서 작품은 전과 달리 복잡해졌다. 텍스트는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지우는 방식으로 편집되고 수정되었다. 추상이 된 텍스트는 극도로 비밀스런 수수께끼 같다. 명석하고 분명한 텍스트로 정서적인 타격을 가하는 바버라 크루거와 달리, 제니 홀저는 보물찾기하듯 숨겨진 단서를 찾아 수수께끼를 풀라고 한다. 그러므로 제니 홀저의 작품 앞에서 냉철해질 수밖에 없다.
1993년에 시작된 러스트모드(Lustmord) 시리즈부터 2017년 영국 블레넘 궁에서 열린 전시회 ‘소프터(Softer)’까지 제니 홀저는 근과거에 자행된 전쟁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폭력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작업에 담고 있다. ‘성적으로 자행된 살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러스트모드’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에 의해 전략적이고 의도적으로 보스니아 여성에게 가해진 성폭력과 고통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여성과 남성의 가슴과 팔 등 노출된 피부 위에 잉크펜으로 적은 텍스트를 클로즈업하여 나란히 배치한 사진들은 보이는 이로 하여금 피해자의 고통과 가해자의 범죄 사이, 긴장된 시간 속으로 직접 뛰어들게 한다. 인체의 뼈들을 정교하게 분리하여 투박한 나무 테이블 위에 배열한 ‘러스트모드 테이블’도 폭력의 재현에 가담한다. 뼈를 두른 은색 금속띠에 적힌 텍스트와 맞닥트리고 나면 더 이상 도망갈 데를 찾지 못한다. 이 전시에서 제니 홀저는 직접 쓴 세 편의 시를 함께 구성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새로운 세기가 전쟁과 함께 시작된 까닭일까? 제니 홀저는 전쟁과 관련된, 특히, 미국 정부가 개입한 전쟁에 대한 비공개 문서들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발화되지 않은 정보와 엇갈린 진술, 이면의 사실들을 예술의 무대로 끌어들인다. ‘쓰면서’가 아니라 덧칠로 ‘지우면서’ 완성되는 ‘편집된 회화(Redaction Painting (2004~2017)’는 기하학적 추상화다. 색면으로 칠해진 캔버스는 무엇이 있었으나 지금은 지워져 거대한 공백으로 남아 지웠다는 행위를 드러내는 예술이다. 지워진 텍스트와 적힌 텍스트, 어느 쪽이 더욱 강렬할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색면을 덧칠함으로써 지워진 텍스트는, 편집되고 수정된 또 다른 진실을 향하고 있다. 어디로든 향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가 닿을 수 있는 언어다.
영국 남부 옥스퍼드셔에 위치한 블레넘 궁(Blenheim Palace)는 1704년 말보로 공작이 블레넘 전투에서 승전한 기념으로 하사받은 궁으로, 말보로 가의 후손인 윈스턴 처칠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블레넘 문화재단은 해마다 예술가를 초청해서 궁에서 전시회를 연다. 2017년 초청작가인 제니 홀저는 강렬한 반전의 의미를 담은 작품들로 블레넘 궁을 채웠다. 인간의 뼈를 수북하게 쌓은 러스트모드 테이블, 고풍스런 초상화 옆에 놓인 편집된 회화, 고색창연한 대리석 조각과 똑같은 대리석에 글자를 새긴 조각, 휘어진 LED 조각 등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다. 밤에는 블레넘 궁의 주요 파사드에 텍스트를 투사했다. 작품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폴란드 시인 안나 스위르(Anna Swir)의 시와 영국 참전 군인들의 증언, 시리아 난민들의 진술 등이 기록되어 있다.
건물 외벽에 투사하는 제논 프로젝트는 시청사, 도서관 등 맥락이 있는 오래된 건물과 결합하여 더욱 강렬하게 사건을 재현한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목소리들이 어둠 속에서 볼드한 흰색 글자로 선명하게 외친다. 글자는 뭉개지기도 하고 날씨에 따라 선명도의 차이가 생기지만 그 또한 실제 상황을 은유하는 방식이 된다. 글자로 바뀐 빛은 건물의 굴곡을 따라 흐르며 목소리가 된다. 아름답고 숭고한 질감 위에 글자들이 펼쳐진다. 아름다움이 깊을수록 충격과 슬픔도 강렬해진다.
바바라 크루거와 마찬가지로, 제니 홀저도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하면서 한글 작품을 발표했다. 움직이고 말하는 조각처럼 보이는 LED 작품 ‘당신을 위하여(For You,2019)’는 서울관의 가장 층고가 높은 서울박스의 천장에 매달려 기계음을 내며 움직이고 빛을 뿌린다. 영어와 한글로 된 문장들이 LED가 보여줄 수 있는 다채로운 효과 속에서 천장으로 솟아오른다. 가장 인상적인 컬러는 핑크, 푸시아, 빨강의 스펙트럼이다. 글자와 배경의 컬러는 자주 반전되고 다양한 효과가 가미되어있다. 한참 텍스트에 집중하다보면 LED 입방체를 초록빛으로 감싸는 착시를 느끼게 된다.
전쟁과 재난에 희생당한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 글을 쓰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쿠르드인 시인이자 중동의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는 호진 아지즈,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으로 시를 쓴 에밀리 정민 윤, 그리고 한강과 김혜순의 시가 흐른다. 너비와 폭이 5인치, 길이가 252인치인 매끄럽고 길쭉한 입방체는 빛으로 글을 쓰는 펜처럼 보인다. 빠르게 움직이는 글자 중에서 JAPANESE SOLDIERS, WAR, CANNOT HELP HER 과 같은 단어를 발견한다. 죽음, 영정, 그림자, 아기, 피 같은 글자가 스쳐지나간다. 평범한 단어들도 살갗에 길쭉한 흔적을 낸 흉터처럼 느껴진다. 반짝이는 빛으로 이루어진 글자들. 한 점 한 점 고독하게 빛나는 좌표들이 만든 목소리는 눈으로 어루만져야 한다. 어째서 세상은 이토록 깊은 고통 속에 있는가. 해답 없는 세상을 통과한 질문들. 텍스트는 그 질문들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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