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홍콩을 떠올리는 메콩강의 짙은 '레드'
여행을 하다 보면 각 나라마다 연상되는 이미지나 색감이 있다. 영국은 칙칙한 빛이 감도는 갈색이나 회색 하지만 강인한 보색(아마도, 유니언 잭 때문일지도..?)과 이 칙칙한 채도 낮은 색감이 강인한 파란색이나 빨간색 혹은 진한 보라색과 조화를 이룬 그런 색감이 어울린다(지극히 주관적입니다..). 일본을 생각하면 영국보다는 청량하고 깔끔하지만 네온사인 컬러 같은 화려하고 다채로운 형광색도 떠오른다. 발리를 떠올리면 비 온 뒤 물을 머금은 촉촉한 큰 나무들과 다채로운 열대 과일 그리고 열대 꽃들의 색감이 떠오른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메콩강과 라오스를 떠오르며 눅눅한 청색과 대비를 이루는 진한 빨간색이 아른거린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여러 번 탑승했던 메콩강의 크고 작은 보트에 달려 있는 커튼이 붉은색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붉은색은 꽤나 매력적이다. 아마도 인테리어에 붉은색이나 파란색, 보라색, 초록색과 같은 계열의 보색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많지 않기 때문에, 이 색감이 친근하면서도 새롭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붉디붉은 이 색이 메콩강과 꽤나 잘 어울리며, 나무로 만든 작은 나무배와 크루즈라 하지만 유럽이나 미주 해안을 가로지르는 크고 화려한 배의 10분의 1 크기밖에 안 되는 빈티지스러운 라오스의 배와 아주 잘 어우러진다.
이틀 전 한 레스토랑과 호텔 겸업하고 있는 곳에서 선셋 크루즈(sunset cruise) 티켓을 구매했다. 오후 4시 반에서 5시 사이에 해가 지는 과정을 2시간 정도 관람할 수 있었다. 크루즈는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 영어가 능통한 여자 사장님(태국분인지 라오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태국과 라오스 국경지에는 태국이나 중국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사업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의 안내를 받고 2층으로 향했다. 깨끗하고 쾌적하지만 빈티지한 세월감이 느껴지는 나무배에 앉아 강가의 풍경을 바라보며 칵테일과 닭꼬치 그리고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저녁을 먹기엔 이르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고 2시간 동안 배에 있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배에서 파는 음식은 당연히 일반 식당보다는 가격이 높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라오스의 물가는 저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행을 할 때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 특히 한국보다 물가가 낮은 곳에서 여행할 때에 많은 경우에 서울의 물가보다 저렴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현지의 물가보다 비싸더라도 그냥 구매하거나 먹는 경우가 있는데, 최대한 그 나라의 물가를 고려하면서 비용을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끔은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 좋은 소고기 스테이크와 와인을 마시는 것과 동남아의 좋은 식당에서 스테이크와 와인을 마시는 것이 퀄리티가 비슷하더라도 동남아가 저렴할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여행지에서 기분을 내고자 한국과 가격을 비교하며 '그래 한국보다 저렴한데 뭐..'라며 먹기도 할 경우가 있지만 나의 여행 철칙 중 하나는 가격에 속지 말자! 그 나라에 갔으면 그 나라 법과 물가, 문화에 맞게 씀씀이를 맞춰보자!이다. 일단 2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여정 중에 먹을 음식을 선택했으니 당연히 맛이 좋다면 여행의 분위기를 한층 더 즐겁게 만들어 줄 것이다. 모히또 칵테일은 깔끔하고 맛있었다. 감자튀김을 한입 베어 먹자 갓 튀긴 신선한 감자튀김의 뜨거움과 특유의 고소함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동남아 스타일의 닭꼬치도 크기는 작았지만 땅콩소스에 찍어먹으니 그 맛이 좋은 레스토랑에서 먹는 닭요리만큼이나 특별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가볍게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우며 크루즈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해가 질 무렵의 햇빛은 살이 탈것같이 뜨거웠다. 서울의 추운 겨울을 견디다 보면 따듯한 햇살이 그리울 때가 있다. 이렇게 따듯한 나라로 넘어오니 이제 서울은 내가 좋아하는 많은 눈이 내린다고 했다. 햇볕이 정통이 내리쬐는 자리에 30분 이상 앉아있다 보니 조금의 현기증이 느껴질 때쯤 배가 출발했다.
크루즈에 탄 다양한 사람들 중에 나 같은 동아시아 사람들 몇 명을 빼놓고 거의 다 유럽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있던 2층 우 쪽의 자리에는 아이 3명과 함께 여행하는 프랑스 부부가 있었고, 라오스 부부처럼 보이는 가이드 겸 내니와 함께 동행했다. 라오스 사람들은 이 작은 메콩 강에서 느긋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는 보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곳에 와서 느낀 것은 아이들이 매우 해맑다는 것이다. 처음 보는 외지인에게도 웃어 보이며 먼저 인사를 하고 그 후로 며칠 동안 마주칠 때마다 환하게 웃어주는 그 모습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날씨가 따듯한 곳에서 어릴 적부터 영어 유치원이나 학원을 전전하지 않고 강물에서 놀고 부모님의 식당에 나와 처음 보는 외국인들을 구경하고 친구들 혹은 형제들과 자전거를 타고 유유자적하게 하루를 보내는 이곳의 아이들의 삶은 정서적인 면에서는 대도시의 아이들보다 건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년도 더 전에 센강에서 탔던 선셋 크루즈의 풍경만큼 현대적인 낭만은 아니지만, 풍성한 올리브 색의 열대 나뭇잎들로 무성한 풍경 그리고 나무로 지어진 작은 집들, 그렇게 하늘을 천천히 물드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슬픈 일도 없는 그저 행복한 휴가지에서 슬픈 인연을 상상하게 된다. 노을 지는 메콩강을 바라보며 사랑에 빠지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서는 각자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여행객들 사이의 일종의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열망을 상상해 본다. 그 상상의 사이에는 이 빨간색 커튼과 주황색으로 물든 하늘이 상상의 무게와 분위기를 잡아준다. 강가의 모래 때문에 탁해 보이는 강의 물색과 올리브빛과 청초한 청색의 나무들이 우성 한 풍경. 그리고 원초적인 이 붉은색이 대비를 이루며 라오스만의 색감을 만들어 낸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모습과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사색에 빠지다 보면 금방 파랗고 맑았던 하늘은 붉은색으로 변한다.
노을을 감상하고 다시 시작지점으로 돌아오는 길은 밤의 시간이 시작된다. 어둠이 내리 앉은 루앙 프루방의 밤은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라오스에는 슬로 보트, 크루즈 그리고 카야킹, 플로팅 튜브와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메콩강의 매력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물도 꽤나 맑다. 수영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맑은 편이라 강을 따라 쭉쭉 뻗은 산맥과 풍경 그리고 미세먼지 하나 없이 맑디 맑은 하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추천한다. 이날 경험한 라오스만의 색채와 분위기는 오래오래 내 마음과 머릿속에 자리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