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정체성
미국 수수께끼 중에 이런 것이 있다.
"what belongs to you but other use it more than you do?" (네 건데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쓰는 것?)
정답은 이름이다.
이름이란 참 묘하다. 내가 내 이름을 말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까 이름이지.) 대부분 내가 선택하지 않고 누군가로부터 물려받거나 주어진다. 그리고 그 이름은 평생 나와 함께 한다. 그래서 그런가 영어 이름 혹은 애칭에 대한 사용이 각별한 것 같다. 내가 쓰고 싶은 이름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으니.
내 영어 이름은 'Lena'다. (영어 발음:리나) 어원은 모른다.
러시아 사람들은 'Lena'가 러시아식 이름이라 하고, 스패니쉬 사람들은 라틴계 이름이라고 한다. 독일 사람들은 독일식 이름이라고 한다. 나는 '아, 그런가 보다' 한다.
하고 많은 이름 중에 왜 Lena인가. 이유는 딱히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이름도 아니고 우상 숭배하던 영화배우의 이름도 아니다. 고등학생 시절 영어 회화학원에 다닐 때 선생님이 영어 이름 하나 만들어 오라고 해서 당시 유행하던 만화 '마법 소녀 리나'에서 영감을 얻었을 뿐이다. 초기 이니셜은 'Lina' 였으나 선생님이 'Lena'로 바꿔 주셨다. 그렇게 나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고 이때 만들었던 영어 이름을 지금 까지 쓰고 있다.
대부분의 직장생활을 미국에서 하다 보니 대학 졸업 후 본명보다 영어 이름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 미국에서 친해진 지인들은 내 한국식 본명이 김리나인 줄 아는 사람도 있고 한국 이름을 말하면 오히려 그게 누구냐며 굉장히 어색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 한국에 있는 친지, 친한 친구들은 내 영어 이름에 익숙하지 않다. 특히 부모님은 내 영어 이름의 존재도 모르신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애가 갑자기 생뚱맞게 'Lena'라니...
나는 내 한국 이름을 좋아한다. 어렸을 땐 그렇게 흔한 이름이 아니어서 남자 이름으로 착각하시는 선생님도 계셨고 '소연', '수현'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학창 시절 내내 같은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한번 본 적 없는데 요즘에는 꽤 많은 여자 아이들이 나와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
내 한국 이름이 세련되고 이쁘긴 하지만 (철저히 주관적 견해) 애석하게도 영어권 국가에서 사용하기에는 쉽지 않은 이름이다. 'Seohyun'으로 쓰이는 이름을 미국애들은 정말 각양각색으로 불러댄다.
‘씨오히운', '쎄오휘언', '쒀헌', '쏘우혀운'
한 글자씩 또박또박 알려줘도 들려오는 것은 항상 내 이름이 아닌 바람 세며 쉭쉭 거리는 이상한 소리이다. 하도 이름을 이상하게 불러대서 이제는 누가 '너 한국 이름 뭐야?'라고 물으면 '넌 알려줘도 평생 발음 못해.'라며 가르치려는 시도도 안 한다.
그래서 그냥 'Lena'로 살았다. 십 년 넘게 'Lena'라는 이름을 쓰니 이제는 내 이름이다. 나는 '김서현'이지만 'Lena Kim'이기도 하다. Lena로 일상생활을 하지만 법적 이름이 'Seohyun Kim'이다 보니 공과금이나 은행 관련 업무로 전화를 할 때면 이름을 말할 때마다 살짝 피곤하다. 어차피 내가 전화해서 '서현 킴'이라 백번 말한들 알아듣지 못할 걸 알기도 하고 내가 굳이 영어 발음으로 '쏘우 효운'하는 것도 뭔가 오글거리고 해서... 그냥 다짜고짜 스펠링부터 말해준다. 내 이름은 서현이지 쏘우 효운이 아니니까.
두 가지 이름을 사용하다 보니 마치 두 개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이름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고 할까. 예를 들어 내 한글 이름이 사용되는 환경에서 나는 진지하고 예절 바르고 조심스럽다. 하지만 'Lena'라고 불려지는 환경에서 나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수평적이고 능동적이다. 신기하게도 이름에 맞게 행동하고자 하는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수 비욘세도 무대 위에서는 'Sasha Fierce'라는 또 다른 자아로 갈아탄다고 하던데, 뭔가 비슷한 느낌이다. 이래서 연예인들이 예명을 쓰나 보다.
오랜 외국 생활을 돌이켜 볼 때 살짝 후회되는 것 하나가 사실 영어 이름의 선택이다. Lena라는 이름을 너무 오래 사용해 버려서 이제는 나의 일부가 되었고 저 멀리서 누가 '리나'라고 소리라도 치면 무의식 중에 고개가 돌아갈 만큼 완전한 내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내 한글 이름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이름을 살리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한글 이름 중에 미나, 수정, 유니, 연아 등 영어 발음이 비교적 쉬운 이름들은 영어 이름으로도 손색이 없다. 첫 글자만 따서 'Seo'라고 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제 와서 영어 이름을 바꾸기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Lena'라는 이름에 익숙해 있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이 여간 쉽지 않다.
국제화가 최고조에 이르는 요즘 시대 굳이 외국에서 살지 않아도 영어 이름 하나씩은 다들 갖고 있는 게 보통이다. 외국계 회사에서 일한다면 응당 영어 이름으로 통성명하는 것은 당연하고 한국 사람들끼리만 모여 일하는 회사에서도 요즘은 영어 이름을 애칭으로 사용한다. 이런 현상이 바람직하다 못하다를 논하고 싶지 않지만 영어 이름을 너무 남용하는 환경은 안타깝다. 미국에서는 오히려 자기 출신을 나타낼 수 있는 고유한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나라 일부에서는 고유성을 너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살짝 염려스럽다. 패션 유통 회사에서 매니저로 일하던 당시 300명 정도 같이 일하던 직원들이 있었는데 이들 이름이 하나같이 다 특이해서 제대로 발음하는 것만도 몇 주가 걸리곤 했었다. 미국에서 영어 이름을 쓰는 것은 상대방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이 고려된 것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상대방이 좀 더 불편하더라도 부모님이 주신 내 이름을 끝까지 지키는 것도 좋은 선택이겠다 싶다.
영화배우 이기홍이 언젠가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국 이름을 쓰는 이유에 대해 '이름을 바꿔가면서 까지 나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발음을 못하면 발음할 수 있게 만들면 된다'라고 했다. 매우 인상적인 인터뷰였다. 외국 사람들이 쉽게 발음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모님이 주신 이름 대신 영어 이름으로 갈아탄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지만 혹시나 일 때문에 아니면 여러 이유에서 영어 이름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길... 이름이란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도구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