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 나는 한 곳에 진득하게 앉아있는 적이 별로 없다. 쓸데없이 부지런한 걸까. 할 일들이 언제나 번호표 들고 차례대로 줄 서 있다. 미션들을 클리어하다 보면 하루가 빨리도 지나간다. 그렇다고 또 매번 일만 하는 건 아니다. 드러누워 드라마 정주행도 곧잘 한다.
이 날도 집안일로 분주했다. 세탁실을 오가며 빨래를 돌리고 마른빨래를 거둬오느라 빨래통을 들고 오가고 있었다. 무거운 빨래바구니를 낑낑대며 거실로 나오는데 저 멀리 소파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딸이 갑자기 얘기한다.
엄마, 넌 나의 축복이야^^
순간 누구보다 민첩하게 움직이던 나의 몸놀림이 멈칫, 발걸음도 멈칫,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이의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으로 날아온 화살은 나를 꼼짝 못 하게 만들어버렸다. 빨래하다 난데없이 들은 고백이었다.
아이의 말 한마디를 듣는 순간, 기분이 좋다 못해 황홀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살면서 몇 십 년 만에 처음 들어 본 말인 것 같다. 어른이 되고 나서 누군가의 '축복'이 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우리가 평소 잘 쓰는 단어도 아니며 어른들끼리 대화하며 쓴 적도 없었다. 그러니 낯선 단어일 수밖에 없고 실제로 직접 이런 표현을 들은 일은 더욱 없었다.
위 표현은 내가 얼마 전 아이에게 고백한 문장이었다. '총명아~ 넌 엄마의 축복이야^^'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느 평범한 주말 낮, 아무 이유도 맥락도 없는 일상 속에서 아이는 내게 그 표현을 낱말 그대로돌려줬다.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말로 내뱉는 것, 그리고 직접 듣는 것은 각각 차원이 다른 영역이었다. 특히 타인의 입을 통해서 '내가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들어보니, 내가 혼자서 '감사하고 축복받은 삶, 나는 귀중한 존재야'라고 되네였던 것을 한 차원 뛰어넘었다. 그냥 그 자체로 온몸에 전율이 되고 감동이 되어 나를 감싸 안았다.
내가 아이에게 건네는 한 마디가 새삼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의 부정적인 말 한마디, 긍정적인 말 한마디가 아이에게도 화살처럼 꽂히겠지. 사랑의 말은 든든한 갑옷과 울타리가 되어 아이의 몸에 방패막처럼 흐르는 자존감이 되어 지켜주겠지. 무심코 건네는 비난의 말은 아이에게 상처가 되겠지. 아이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고 올바른 언어습관을 실천하게 만들어 나를 더욱 성숙하게 인도하는 것은 훌륭한 책도, 강의도 아니요, 바로 일상에서 접하는 육아다.
어느 선선한 밤공기와 산들바람이 부는 저녁,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단둘이 저녁 산책에 나섰다.
예전엔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유모차에 앉아있으면 뒤에서 엄마가, 그리고 부모가 하는 말이 여과 없이 다 들린다. 아주 아기일 때부터 들었을 것이다. 훌쩍 큰 아이와 나는 방풍커버로 덮혀진 유모차를 사이에 두고 저녁 공기를 함께 마시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 불빛은 밝게 빛나고, 산들산들 부는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어둠이 깔린 저녁은 시끄럽고 번잡한 도심 속에 내려앉아 모두를 차분하고 평온하게 만들었다. 밤공기를 거니는 나의 느린 발걸음 속에서 평온함, 여유, 충만함이 채워졌다. 현재를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이 순간에 가진 것들에 감사해졌다.
- (유모차를 밀며) 총명아~~~~
- (유모차 안에서) 응~~~
- 엄마가 총명이 많이 많이 사랑해~~~
- 응~~~~
- 총명이는 엄마의 축복이야~
- 총명이는 엄마의 보물이고, 보배야
- 총명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 총명이 가 태어나줘서 엄마아빠는 정말 행복해
- 너는 그 존재만으로 아주 귀한 사람이야
- 총명이는 너무 사랑스러워~
- 엄마는 총명이가 너무~ 좋아!!!
유모차 뒤에서 나의 사랑고백이 이어졌다.아이는 별말 없이 가만히 듣고 있더니
- 나도 엄마가 소중해~ 엄마 사랑해
라고 대답해 줬다.
감정을 따라 연달아 고백을 하고 나니 기분이 후련해졌다. 평소에 미처 자주 표현하지 못했던 말들이 몰랑몰랑한 밤공기를 타고, 유모차를 넘어 전달되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건 나였다. 아이에게 내 마음을 꽁꽁 숨기지 않고 말로써 표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를 남기지 말고, 이 사랑의 마음을 내 가족에게 내 동료에게 내 지인에게 더 자주 표현해야겠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같은 것은 없다. 표현해야 느낄 수 있고, 말을 해야 그 사랑이 더욱 배가 되어 넘쳐흐르는 것 같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서로 주고받다 보면, 세상은 축복이 넘치는 곳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