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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나팍 Mar 19. 2024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작년 한 해를 겪으며 가장 크게 얻은 값진 깨달음이 있다.

늘 발전을 추구하는 진취적인 나는 현실에 안주하는 건 어쩐지 죄책감(guilty)을 느낄 만큼 선호하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과 배움, 성장은 내 삶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였다. 언제나 생산적인 것을 좋아했고, 스스로가 비생산적이거나 게을러지는 것 한심하게 여겼다. 그러니 어쩌다 넷플릭스 정주행이라도 하고 나면, 흘려버린 시간을 안타까워했다.



직장인이자 워킹맘으로 하루 11시간을 회사와 출퇴근에 쓰면서도, 집밥을 고수해 살림을 도맡고, 아이 양육도 놓치기 싫어 최선을 다하며, 점심시간을 활용해 운동을 하고 있다. 틈틈이 새로운 '사이드 프로젝트'에 도전한다고 여러 가지 일을 벌이기도 하고, 주기적으로 재테크, 자기 계발 등 강의를 들었고, 1년 전엔 강의나 코칭도 했으며, 가끔 브런치 글을 쓰고, 독서도 했다.


주말엔 나들이나 여행도 챙겨 다니면서 이 모든 것을 했다. 노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스스로 마냥 쉬거나 노는 꼴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발전적이지 않은 날들을 보내면 마음 한편이 불편했으니까 말이다.


돌이켜보면 마치 쫓아오는 이도 없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해야 하는 말에 올라타 계속 달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가족들의 건강을 챙겨야 하는 중요한 일이 발생하면서 가족을 비롯한 나의 마음 건강상태를 점검하게 되었다. 지자체에서 워킹맘 심리상담을 지원해 주는 훌륭한 제도를 활용해, 몇 차례 상담을 받았고 내겐 다음의 처방이 내려졌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세포가 쉬게 하세요




- 네? 저 올해는 책을 꼭 써야 하는데.... 몇 년간 미뤄왔단 말이에요.
- 안 돼요. 올해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All stop 하세요.

- 초고쓰는 것만 하면 안 될까요?

- 이렇게 매번 미션을 클리어하듯이 많은 걸 이뤄온 사람에겐 아무것도 하지 않기가 매우 어려운 일일 거예요. 이번 기회로 한 번 실천하고 지켜보세요. 먼저 충분히 쉬고 비워야 다음을 채울 수 있습니다.
- (할 수 없이) 네....


올 해도 해내려고 했던, 해내고 싶었던 산더미 같은 목표들을 떠올리며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어쩐지 상담이 끝나고 나오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매일 놀아도 괜찮을까?'




상담가는 이미 내가 많은 걸 하고 있다고 했다. 일하고 육아하고 살림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차고 충분히 가치 있는 일들을 해내고 있다고 했다. 더 이상 그 무엇도 더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세포가 쉴 틈을 주어야 다른 일도 해낼 수 있다고 했다. 또 하나, 이미 내가 이룬 것, 그리고 가진 게 매우 많다고 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걸 나만 몰랐던 것 같다.



내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도 이미 '가치 있는 일'인데 나는 여기에는 의미부여를 두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일상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으며, 어떻게 시간을 더 쪼개거나 효율적으로 써서 더 많은 것들을 이뤄낼 수 있을지만 궁리했다. 어떻게 더 많은 부를 이뤄낼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게 잘 안되면 속상해했다. 말로는 '일상을 충만하게 살자'라고 다짐하면서도 일상에 감사하기는커녕, 늘 바쁜 현실에 부족한 부분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가족들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일상의 흔들림을 경험하게 되었다. 먹는 것, 자는 것 등 기본적으로 해 오던 것들이 흔들렸다. 그러자 매일 내가 하던 '잘 먹고 잘 자기'가 절대 당연한 게 아니라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온몸으로 느꼈다. 다들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불면증에 시달릴 때는 '예전처럼 잠만 잘 자게 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도 당연히 여겼던 내 하루하루,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의 건강과 안녕 등 매일의 무탈함은 당연한 게 아니라 매일 내가 받고 있는 '선물 같은 하루'였다.


당연한 건 결코 없었다.
온전하게 오늘 하루도 웃으며 보내는 이 순간들이 내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며, 내가 이뤄 온 날들이며, 그 무엇보다도 가장 감사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욕심이자 그 이상의 바람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자 나의 하루를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예전엔 불평, 불만, 개선점, 또는 부족한 점을 더 많이 발견하고 나아가려 했다면,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자체로 이미 넌 충분해
이미 소중해
이렇게 건강하게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야. 그러니 더 바랄 것이 없지.

여기에 Better life를 추구한다면 그 또한 존중해. 하지만 이미 지금의 너의 삶은 Best life이고, 오늘 하루, 이 순간들이 모두 최고의 날들이야.



예전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의 평범한 날들이 모두 소중해졌다. 행복을 느끼는 만족점이 확 내려왔다. 꼭 무엇을 달성하거나, 더 가져지만 행복한 게 아니라 그냥 오늘 하루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만족스러워졌다.



친구와 함께 티타임을 하고, 아이들은 집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예전과 다르게 '충만한 행복'을 느낀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수다 떠는 한가로운 주말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더 바랄 것이 없다. 독박육아를 탓할일도 없다. 아늑한 내 집에서 소중한 이들과 함께하는 이 시간, 이 여유가 다 내 것이다.


어느 주말엔 아이와 함께 뒹굴뒹굴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따뜻한 물에 반신욕이 하고 싶어졌다. 아이가 먹고 싶다는 딸기주스와 따뜻한 대추라떼를 홈메이드로 준비해 탕에 들어갔다. 그 어느 해외 유명 관광지의 전망대 카페가 부러울 게 없었다. 엄마표 맛있는 음료와 따뜻한 욕조,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시간들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느낀다.



이렇듯 사소한 일상 하나하나가 내게 감사로 다가왔다.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집안일이 많다고 투덜대는 게 아니라, 집안일을 하면서도 콧노래가 나올 수 있었다. 내가 보내는 시간들에 가치를 두자, 내 삶이 더 풍요로워졌다. 어떤 현실에 처해있든, 어떤 힘든 역경 속에 있든, 나 자신과 내 하루에서 기쁨을 누리고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지금 여기에

온전히 있음을 감사히 여기며

기쁨과 평온으로 충만하는

내가 되기를



Be present
Focus on the present moment and be aware of your surroundings.
Notice the sounds, smells, and sensations arounds you without jud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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