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나팍 Feb 07. 2022

부부싸움을 본 32개월 아이가 하는 말

그러니까 내가 언제 몸에 좋은 걸 해달라고 했냐고!
난 이런 거 필요 없다니까?

저녁 식탁에서 남편이 외친다.


"난 우리 가족 건강을 위해서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데,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주 1회는 당신이 요리하면 되겠네"

"뭐라고??!"

"이번 김치찌개는 내가 건강을 위해 일부러 맛없게 한 게 아니고! 내 요리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진짜로!"

"당신이 원래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면 상관없는데, 건강식에만 너무 몰입되어 있으니까.. 고생만 하고. 난 그게 속상해!!"


아뿔싸. 오늘 '말그릇'이란 책을 읽고 어떻게 상대와 대화하는지, 어떻게 넓은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지를 마침 뿌듯하게 읽은 직후인데 남편과 한바탕 하고 말았다. 웃긴 것은 남편이 '당신이 00 하니까 내가 속상해'를 뱉었을 땐 머릿속에서 '어랏? 나 대화법의 기술을 쓰고 있네? 책도 안 읽은 사람이 잘하고 있군'이라 생각했고, 내가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말을 해줘야 알지!'를 내뱉으며 '어랏, 이거 책에 나온 부부싸움 사례 대사인데.. 내가 똑같이 뱉고 있군. 책에서 뭘 실천하라고 했더라? 생각이 하나도 안나' 이런 생각들이 떠다녔다.

실로 반년만의 다툼이었다. 문제는 맛없는 김치찌개로 시작되었다. 요리시간이 부족해 급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김치찌개를 끓이다 보니 물 조절에 실패했고 싱겁고 맛없는 김치찌개가 되고 말았다. 물 넣고 돼지고기랑 김치 넣고만 끓여도 실패하기 힘들다는 요리, 바로 그 김치찌개가 맹맹하게 맛없으니 당황스러웠다. 찌개류는 염분이 많기 때문에 평소에 잘하지 않는 요리다. 결국 나는 부엌에서 발동동 굴렀고 마침 퇴근한 남편이 고추장을 넣어 요리를 완성시켜 주었다. 그런데 하필 점심메뉴도 식당에서 아주 맛있게 김치찜을 먹고 온 남편이었다. 안 그래도 메뉴가 겹쳐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남편은 건강식에 몰입된 내가 일부러 간을 약하게 한 거라 생각해서 투덜대던 대화는 이내 말다툼으로 번졌다.


남편 말이 맞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건강한 요리'에 꽂혀있었다. 건강한 재료, 조미료는 물론이고 온갖 현대병을 유발하는 습관의 변화를 시도했다. 예를 들어, 잡채는 기본 레시피가 기름에 볶는 건데, 언제부턴가 스텐 팬으로 물을 이용해 잡채를 볶았다. 건강에도 좋고 요리도 간편해지는 일석이조 신세계를 경험한 나는 매우 만족하고 있던 터였다. 설탕은 식탁에 오르지 않은지 2년이 넘었고, 단맛을 내는 조미료조차 손 한번 뻗을 거리에 있는데 가급적 손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내 요리는 '단짠'과는 거리가 멀고, 조금은 싱거울 듯 말 듯, 맛이 있을 듯 말 듯 아슬아슬 경계를 타고 있었다. 점점 조리도 간편하고, 자연 친화적이고, 채소도 많이 먹고,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요리법에 빠져들며 신나게 배움을 넓혀 나갔다. 그런데 내심 불만인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가장 소중한 내 남편이었다. 그는 내 가치관과 방식 때문에 좋아하는 입맛도 내려놓고 내 밥상에 맞춰 군말 없이 식사를 했다. 나 역시 워킹맘으로서 집밥까지 준비하느라 매일이 전쟁터였다. 그러다 오늘 이 부분이 충돌하고 만 것이다.


결국 내 방식에 부부가 함께 동의한 게 아니기 때문에 남편의 의사를 반영하기로 다짐했다. 7:3 정도의 비율로 조금씩의 변화만 시도하기로 말이다. 가만히 보니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던 것 같다. 혼자 열 내고 다독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다짐까지 하고 나니 그제야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일하고 와서 배가 고팠을 것이기에 밥을 먹으며 다퉜고, 나는 입맛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밥을 먹지 않았고, 아이는 옆에서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처 신경 쓸 여력이 없었는데 우리가 다투는 사이, 아이는 밥 먹는 대신 다른 것을 했다.




부부가 다투자 32개월 아이는 식탁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더니 갑자기 말한다


"사랑해~~"


엄마 아빠를 번갈아 바라보며 앙증맞은 손으로 하트 모양까지 그려가며 연신 얘기한다.


"사랑해~~~"


어색하지만 애쓴 미소도 함께 날려준다. 평소에 '엄마! 밥 먹을 때는 핸드폰 하면 안 되지~ 나처럼 핸드폰 버려!' 이상의 의사표현을 구현할 줄 아는 우리 아이는 작지만 강하고 부드럽지만 힘 있게 연신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별 반응이 없자 심드렁해진 아이는 이내 식사 장소를 이탈했다. 상황이 마무리되자 그제야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는 중재뿐 아니라 내게 중요한 것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주었다. '건강하게 잘 먹기'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사랑과 기쁨이 넘치게 함께 식사하는 것이다. 그래야 소화도 잘되고 영양도 듬뿍 얻을 수 있다. 집밥이 중요한 이유다. 설탕이 좀 들어가고 조미식품이면 어떻고 냉동식품이면 어떠랴. 함께 맛있게 먹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아이는 소화가 안되는지 밥을 거의 먹지 못했고, 남편 역시 체한 것 같이 배가 아팠다. 아빠 배가 아프다고 했더니 아이가 쪼르르 달려가 '치과놀이' 장난감을 가지고 온다. "아빠~ 아프니까 내가 치료해줄게~' 그러더니 치과도구를 들고 아빠 입 주위를 뚱땅거린다.



그래, 바로 이거지

건강한 식사란 가족의 기쁨이 음식 위에 살살 뿌려진 식사지. 놓치지 말자



그래도 마무리는 이 문구를 쓰고 싶다


I am what I eat
-히포크라테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는 떨어진 거 주워 먹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